광복이전 한반도 최대 무역항 ‘인천항’ 신항으로 확장
국내 최초철도 경인선 개통, 인천발 KTX시대로 진화

 

②인천항·경인선과 물류

인천은 물류의 허브였다. 개항(1883년)이래 한반도의 제1무역항이었던 인천항과 우리나라 최초의 철도인 경인선, 경기 내륙을 연결하는 수인선 등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인천시가 8대 전략산업으로 물류산업을 가장 우선순위에 둔 것도 인천의 역사성과 무관치 않은 셈이다.

개항이래 인천항은 우리나라 무역량의 50%를 처리하는 국내 최대의 무역항이었다. 1910년 1천672만1천원이었던 인천항 수출입 무역액은 1920년 7천582만2천원으로 치솟았다. 제1차 세계대전(1914년 7월 28일~1918년 11월11일)이후의 세계경제의 호황과 4천500t급 선박 3척이 동시에 접안할 수 있도록 인천항 제1선거 공사(1911~1918년)준공의 후광이었다. 이후 1931년 터진 중일전쟁과 인천지역의 공업화로 1935년 인천항의 무역액은 2억7천997만8천원에 껑충 뛰어 올랐다.<표 참조>

 
당시 인천항은 우리나라 쌀 생산량의 50%이상을 처리하는 무역항으로 ‘대한민국의 절반을 먹여 살린다’는 말이 돌 정도였다. 지금의 중부경찰서와 인천여상 앞 1·8부두인 ‘칠통마당’은 쌀가마와 짐꾼들로 넘쳐났다. 1892년 지금의 중구 송학동에 60마력짜리 증기동력를 장착한 미국계 타운센트 상회의 정미소는 일본은 물론 러시아 연해주까지 쌀을 수출하기도 했다.

인천의 정체성과 곧잘 비유되는 짜장면의 원조도 이때 탄생했다. 당시 중국인들은 이전의 산둥성의 화상(華商)들과 달리 대부분 혼란했던 중국 내부 정세를 피해 빠져나온 낭론 막조동자 ‘쿨리(苦力)’들이었다. 짜장면은 이들 쿨리들에게 손쉬운 끼니었다. 나무로 만든 손수레에 밀가루를 싣고 선창에 나가 수타면을 뽑아 삶은 뒤 춘장을 대충 얹어준 것이 지금의 짜장면이었다.

한반도 최대 무역항이었던 인천항은 한국전쟁 이후 곤두박질쳤다. 폭격으로 부두시설이 망가진데다가 피난민들이 부산으로 내려가면서 제1항구의 위치를 부산항에 빼앗긴 것이다.

 
1887년 당시 소월미도를 기점으로 내항과 외항으로 구분했던 인천항은 이제 송도국제도시 인근의 신항시대를 맞고 있다. 지난 6월1일 사업비 9천703억원이 투입된 송도신항에 컨테이너부두 6선석이 가동을 시작했다. 총 3단계에 거쳐 개발되는 인천신항은 컨테이너부두 25선석을 포함해 총 29선석이 개발된다. 항만배후부지는 619만㎡에 달한다.

인천내항은 화물 중심에서 사람 중심의 항으로 변신하기 위한 재개발을 앞두고 있다. 이를 위해 늦어도 올해 말까지 8부두가 먼저 시민에게 개방된다. 인천항의 새로운 변화가 시작된 셈이다.

1900년 12월 경인선(인천~서울간 42㎞)이 인도와 일본에 이어 아시아에서 세번째, 국내에서 처음으로 개통됐다. 1897년 3월 인천 우각리(현재 도원역 부근)에서 착공식을 열린 뒤 3년 9개월만이었다.

 
경인선이 개통되기 전 인천과 서울의 교통수단은 한강을 이용한 해운이 아니면 육로였다. 아침 일찍 인천을 출발해 오류동에서 점심을 먹고 영등포를 거쳐 양화진까지 걸어 갔다. 여기서 다시 배를 타고 한강을 건너 마포에 도착했다. 1917년 한강 인도교가 놓여질때까지 인천서 서울로 가는데 꼬박 하루가 걸렸다.
그것도 아니면 서곶에서 배를 타고 염하수로를 거쳐 한강을 통해 서울로 들어갔다. 물때를 맞춰야 하는 뱃길도 인천서 서울을 진입하는데 7~8시간이 소요됐다.

경인선 개통은 우리나라 근대역사의 대사건이었다. 인천을 남북으로 갈라놓은 단초를 제공했다는 단점에도 불구하고 1시간45분만에 경인선 개통은 인천과 서울을 이어줬다.

1910년 인천역의 연간 이용객은 승차(10만453명)와 하차(10만8천534명)을 포함해 모두 20만8천987명이었다.<표 참조>

 
당시 인천 거주 인구가 외국인 1만6천191명을 포함해 3만1천11명인 점을 감안하면 엄청난 이용자수다. 지난 6월 한달 간 경인선 인천역 이용자수는 21만3천377명(승차 10만5천89명·하차 10만8천288명)이다.

경인도로도 인천과 서울을 잇는 동맥역할을 했다. 특히 인천의 산업개발에 중요한 통로였다. 1931년 경인도로는 경기도의 3개년 빈민구제 사업이었다. 한강인도교~영등포간 폭 30m 포장도로 조성사업이었다. 이때 인천상공인들은 영등포에서 인천까지 기존 12m 도로를 30m로 확장 개설할 것을 청원했고, 이것이 경인도로의 밑바탕이었다.

1935년 수인선이 부설됐다. 수인선은 인천역에서 수원역까지 52㎞의 협객선이었다. 수인선은 경기도 용인·이천·여주에서 생산되는 쌀을 인천항으로 실어 나르고, 인천에서 생필품을 내륙으로 공급했다. 송도~시흥 오이도까지 운행하는 수인선은 올해 말 인천역까지 복선으로 이어져 새로운 수인선 시대가 열린다.

 
인천은 여전히 물류의 허브도시다. 2001년 개항한 인천국제공항의 여객이용자는 올해들어 5월까지 2천59만명이었다. 화물은 같은기간 138만2천t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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