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83년 6월 조계 약정…일본인-한국인 양극화
2003년 8월 경제구역 지정…인천속 富의 계층화

1910년 한일합병 당시 3만1천11명(외국인 1만6천191명)에 지나지 않았던 인천(1914년 인천부 면적 6.06㎢)은 현재 인구 297만653명(외국인 5만6천382명 포함)의 거대 도시로 변모했다. 광복 직전인 1944년 168.88㎢이었던 인천의 면적 역시 1천46.27㎢으로 넓어졌다.

일본과 청국, 러시아, 영국, 미국 등 각국 조계지(0.51㎢)를 끼고 있던 작은 포구, 인천이 국내 최대의 경제자유구역(132.9㎢)을 둔 글로벌 도시로 성장하고 있다.

그 성장의 과정은 각축((角逐)이었다. 때론 외부세력과 때론 향토세력끼리 겨루고 쫓는 치열한 삶의 경쟁을 벌여왔다.

광복 70년이 지난 지금, 주체와 대상이 바뀌었을뿐 여전히 인천은 각축장이라는 사실은 별반 달라지지 않았다. 개항과 한일합병, 그리고 광복에 이르기까지 과거 인천에 축적된 시대적 산물들이 현재에도 배어나오고 있는 것이다.

오늘의 인천은 과거의 성장판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따지고 보면 항공·첨단자동차·로봇·바이오·물류·관광·녹색금융·뷰티 등 현재 인천시가 키우고자 하는 8대 전략 산업도 광복 이전과 맞닿아 있다.

광복 70년을 맞아 연재를 통해 인천의 ‘새로운 과거, 오래된 미래’를 들여다본다.

①조계지와 경제자유구역

1883년, 새로운 인천의 시작이었다. 그해 1월 1일 지금의 인천시 중구 제물항로 파라다이스 호텔인천 주변의 제물포항이 열렸다. 부산(1876년)과 원산(1880년)에 이어 그 다음이었다. 자그마한 포구였던 인천은 외교의 중심항으로, 서양 문물 유입의 창구로 변모했다. 근대도시, 인천의 성장 발판이었다.

 
그해 9월 30일 조선 정부는 역사상 처음으로 일본과 조계약정을 맺었다. 자유공원 남쪽 해안가, 지금의 중구 관동 1·2가와 중앙동 1·2가 2만3천100㎡을 포함해 그 일대 3만㎡의 터였다.

‘외국인의 주거지 제공과 이를 통한 외국 통상 여건 제공’을 위한 조계의 설정은 120년 뒤인 2003년 8월, 외국인의 생활 여건 개선과 외국인 투자촉진을 위해 대한민국 최초로 지정된 인천경제자유구역과 닮은 꼴이었다.

청국도 그 이듬해 4월 조선 정부와의 조약(仁川口華商地界章程)을 체결하고 선린동 1만6천500㎡에 조계를 설치했다.

이에 질세라 영국·러시아·독일·미국 등 외세는 6개월 뒤 인천제물포각국조계장정(仁川濟物浦各國租界章程)을 맺고, 북성동·송학동·관동 일대 46만2천㎡에 조계를 그었다.

1883년 75가구 348명에 불과했던 일본인은 1892년 388가구에 2천540명으로 불어났다. 당시 인천 조계지 안의 일본인수는 국내 전체 일본인의 30%를 차지했다.

청일전쟁((1894년 6월∼1895년 4월)이후 인천에 사는 일본인은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1895년 일본인은 709가구에 4천148명에 달했다. 당시 한국인은 1천146가구 4천728명으로 일본인수와 엇비슷했다.

조계지가 포화상태에 달했다. 일본 영사관터 6600㎡를 빼면 실제 일본인들이 집을 짓고 살 수 있는 땅은 2만6400㎡ 남짓이었다.

일본인들은 트집을 잡기 시작했다. ‘언덕배기에 자리잡은 청국 조계지에 비해 습하다느니, 부산과 원산의 일본조계지는 각각 33만㎡와 29만7천㎡로 인천의 10배 정도이라느니…. 일본인들은 조계지 확장을 요구하며 조선 정부를 압박했다.

결국 일본인은 1899년 5월 조계지 앞 해변을 너비 50m, 길이 258m를 메웠다. 지금 해안동 3·4가인 국민은행 신포지점에서 인천중동우체국 앞 신포시장 주차장까지 면적 1만3천200㎡이었다.

1910년 한일합병으로 치외법권 지역인 조계가 폐지되자 일본인은 한국인 거주지로 파고 들었다. 관동과 중앙동을 벗어나 신포동·선화동·답동·용동·화수동·만석동까지 주거지 66만㎡를 넓혔다. 신포동~신생동~중앙동에 이르는 일본인의 메인스트리트 ‘본정통(本町通)’의 태동이었다.

청국 조계지도 과밀현상이 나타났다. 1900년 2천274명이었던 청국 거주자는 1910년 2천886명으로 늘었다. 청국인들은 비싼 땅을 사들여 새 거주지를 마련했다. 내동과 경동 등지를 중심으로 하는 ‘싸리재’였다. 그들은 이곳을 ‘삼리채거류지(三里寨居留地)’라는 이름을 붙이고, 포목점·요릿집·이발소·채소점·호떡집 등을 개점했다. 이곳은 인천 내 청국인의 60%가 사는 제2의 청국조계지이었다.

이렇게 제물포 개항이래 광복 전까지 매립과 내륙 확장으로 인천의 땅 314만3천㎡가 외국인들의 차지였다. 1932년 인천의 총인구 6만8천여명 중 내국인이 81.2%, 일본인은 16.5%에 불과했다. 하지만 1인당 평균 토지소유 면적은 일본인이 236.6㎡로 한국인의 14.52㎡보다 훨씬 많았다.

인천은 경제자유구역을 한창 개발 중이다. 송도 53.4㎢와 영종 61.7㎢, 청라 17.8㎢ 등 모두 132.9㎢에 달한다. 송도국제도시의 경우 개발계획 변경을 통해 17.7㎢(1994년)→21.8㎢(2000년)→51.1㎢(2008년)으로 매립 터를 계속 늘렸다. 외국인 정주여건 개선과 외국인 투자 촉진을 위해서였다.

 
하지만 올해 1월 기준 내국인은 21만8천617명(송도 8만4천190명·영종 5만6천935명·청라 7만7천492명)이다. 외국인은 내국인의 1.65%인 3천610명(송도 1천812명·영종 1천90명·청라 708명)이다.

허울뿐인 인천경제자유구역이라는 말이 여기서 나온다. 송도경제자유구역 개발 초기 인천은 외국 부동산 회사에 개발권을 통째로 넘겼다. 이 회사는 송도 중앙공원을 1달러에 조성한다는 미끼로 수익성이 높은 아파트 등을 대규모로 짓고 분양했다. 거품이 잔득 낀 송도국제도시 아파트의 분양가는 3.3㎡당 1천만원을 훌쩍 넘기면서 인천의 집값 상승을 부추겼다.

그 결과 인천의 양극화는 그 속도를 더 했다. 당초 송도국제도시 등 경제자유구역에서 벌어들인 수익으로 구심도심에 재투자하겠다는 정치인들의 말은 헛말로 드러나고 있다.

80여년 전 17배나 차이 나는 땅덩어리를 갖고 살았던 일본인과 한국인처럼, 인천의 한국인 속에서도 그 차별이 짙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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