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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년 5월 일간신문 창간 -> 2016년 11월 인터넷종합일간지 및 주간지 재창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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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년째 현역···진료환자만 250만명
“자유를 찾아 38선을 넘은게 엊그제 같은데 벌써 60년이란 세월이 흘렀네요.”

지난 56년간 소아과 전문의로서 인술을 펼쳐온 김관철(88) 원장. 최근 회고록 형식으로 자신의 삶을 정리한 팔순기념문사집 ‘인술찾아 80평생’을 내놓았다.

김 원장은 지난 1918년 평안남도 순안에서 태어나 평양의전을 졸업한 뒤 이듬해인 1942년 초에 일본군에 징집돼 중국 신경 만주 철도병원에서 첫 근무를 시작했다.

“다른 일본학생들은 전쟁터로 징집돼 시신이 되어 돌아오곤 했지만, 저는 다행히도 후방에서 근무를 하게돼 지금까지 일을 할 수 있었던 것 같네요.”

근무 임기를 끝내고 1943년 가을 모교 부속 병원에 복귀해 소아과에서 근무를 했다.

그러나 당시 평양시내에는 병명 미상의 전염병이 돌아 병원마다 입원실이 부족했고, 의료진 또한 모자라 밤을 지새우기 일쑤였다.

“당시에는 이름 모를 전염병 때문에 잠도 못자가며 환자들을 돌보았죠. 일본인 조선인 할 것 없이 의사라는 이름으로 모두가 하나가 될 수 있던 시기였어요.”

그는 이때가 가장 많은 의학을 연구하고 의제를 발표하는 등 의사로써 많은 활동을 할 수 있던 시기였다고 설명했다.

만주 철도병원에서 경험한 이형폐렴(마니코프라즈마 폐렴)에 관한 의제를 1944년에 발표한 적이 있는데 이때까지만해도 이형페렴을 발표한 의사가 없었다는 것이다.

“스승이었던 나가야마 교수가 내가 쓴 논문을 세계 의학회에 등록 못한 것을 숨을 거두는 순간까지도 아쉬워 했어요.”

1948년 봄. 김 원장은 공산치하인 북한의 숨막히는 질곡의 생활에서 벗어나고자 가족을 이끌고 피난길에 올랐다.

목숨을 걸고 38선을 넘는 고행은 김 원장 가족뿐만 아니라 인간이 부담하기엔 너무도 버거운 일이었다. 38선을 무사히 넘어 정처 없이 떠돌다가 찾아온 곳이 인천이었다.

“당시 동구 창영동에 셋방을 하나 얻어 생활을 했어요. 그러던 중 얼마 안되서 평양의전 동창을 만나 도움을 받아 창영초등학교 옆에서 지성소아과 의원 간판을 내걸고 진료를 시작했죠.”

병원을 개업하고 한동안은 주변 이웃들만 병원을 찾더니 점차 진료환자가 늘고 일손이 딸리게 되었다. 병원이 궤도에 오를 무렵인 1950년 6월25일 한국전쟁이 일어났다.

김 원장은 부득이 병원 문을 닫고 사랑하는 가족을 떼어놓고 군의관으로 한국전쟁에 참전했다.

3년 간의 밀고 밀리는 동족상잔의 전쟁은 260만명의 목숨을 앗아갔고, 1953년 7월27일, 전쟁의 총성이 멈추게 됐다.

군의관으로 참전했던 김 원장은 전역 후 집으로 돌아와 ‘지성소아과 의원’의 문을 다시 열었다.

당시 인천은 상륙 작전의 전쟁 마당이었던 관계로 시가지는 완전 폐허가 돼 제대로 된 가옥의 모습은 볼 수 없었고, 식량과 생활필수품의 부족으로 시민의 생계는 엉망이었다. 민심 역시 흉흉한 시기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