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한조 재인천충남도민회장

   

군 제대후 인천체대 무도과 입학 … 인천과 첫 인연  

1990년 충남인들 지역별로 나눠 시·군별 향우회 창립

도민회장학재단 활성화·기숙형 학사관 건립 재추진

운명은 까칠했다. 그의 나이 두살, 아버지는 6·25전쟁에서 전사했고, 남편을 잃은 어머니는 집을 나갔다. 친할머니 무릎에서 자라던 그는 또다시 작은아버지 손으로 넘겨졌다. 조모(祖母)가 작고한뒤부터였다.

그의 삶은 치열했다. 철부지 나이에 권투를 시작했다. 배고픔을 달래고 싶었다. 거부할 수 없는 기구한 운명에서 달아나고픈 간절함에서였다. 말이 권투지, 다듬어지지 않은 주먹은 싸움판의 도구나 다름아니었다. 정권(正拳)과 근성으로 장항선의 건달들을 눌렀다.

그는 비굴하지 않았다. 감투를 믿고 폼만 잡지 않았다. 내가 믿는 선배, 나를 따르는 후배들을 위해선 몸을 사리지 않았다. 비록 버림받는 한이 있을지라도 먼저 내치는 경우는 없었다. 옳은 길 앞에서 쭈뼛대지 않았다. 그런 당당함이 장한조(64)를 제13대 재인천충남도민회장으로 만들었다.   

인천과는 어떻게 인연이 닿은 겁니까?

▲ 김포대학 임청(72)총장님 아시죠? 그분이 제 충남 보령 고향 선배입니다. 1970년 당시에는 인천체육전문대학 학장님으로 계셨어요. 군대를 제대했을 때인데 그분의 연락을 하셨어요. 대학에 진학할 생각이 없느냐고요. 그래서 그분의 추천으로 인천체대 무도과에 들어갔습니다. 그것이 인천과의 첫 인연이었습니다.

 

무도과에서 전공은요?

▲ 권투를 했어요. 사실 중학교 때부터 권투를 했고, 1967년에는 57㎏ 팬텀급으로 아시아권투선수권대회 국가대표로 출전한 경력도 있습니다. 그런데 상대방 선수의 주먹 한방에 오른쪽 눈썹 밑이 찢어져 피가 흐르는 거예요. 숨은 차오르지, 피가 눈을 가려 앞이 안 보이는 겁니다. 결국은 TKO로 무릎을 꿇고 말았죠. 얼마나 창피한지! 그 길로 권투를 접었습니다.

 

경기도에서 체육선생님도 하셨다면서요. 왜 그리 빨리 그만 두셨어요?

▲ 서울서 직장생활을 하다가 경기도 벽제에 있던 지선중학교 체육선생으로 들어갔습니다. 지금은 벽제중학교로 바뀌었죠. 그것도 임청 총장님의 소개였죠. 거기서 6년 동안 교편을 잡았는데, 이북 출신인 장인께서 “돈벌이도 시원치 않은 선생을 뭐하러 하냐”며 사업을 권유하셨어요. 서울 동대문운동장 스포츠센터 운영을 맡을 생각이었죠.

 

체육선생님도 성격에 맞았을 것 같은데요.

▲ 재미있었죠. 한번은 후배들이 내가 선생한다고 하니까 학교에 찾아 왔어요. 아이들 가르칠 때 쓰라고 배구공이며 축구공, 농구공 등을 한보따리씩 싸들고 왔는데, 하나같이 깎두기 머리에 검은 양복을 입고 나타난 거예요. 남들이 보기에는 영락없는 조폭이었죠. 그때 교장이 여자 선생님이었는데 “애들아, 교장선생님이다. 인사드려”하니까 “예! 형님”하면서 90도로 허리를 굽혀 “안녕하십니까?”하는 거예요. 교장 선생님의 얼굴이 허옇게 질리는데,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들어가고 싶은 심정이더라구요. 그것도 한두번이지, 선배를 위로 방문한답시고 똑같은 차림의 후배들이 툭하면 찾아오는데, 나중에 학교에 눈치가 보이더라구요. 어떤 선생님들은 “장 선생, 예전에는 뭐하셨어요”라며 꼬치꼬치 따져 묻지 않나, 선생을 그만 둔 이유 중에 하나이기도 하죠.

 

그럼 인천서는 언제 사업을 하셨어요?

▲ 스포츠센터를 막 차리려고 하는데 큰 매형이 안양서 봉제공장을 동업하자는 거여요. 1년 만인 1981년 1월 쪽박을 찼죠. 그리고 나서 서울 독산동에서 직원 6명을 두고 지하철에 들어가는 고무패드를 만드는 공장을 운영하다가 남동산업단지가 조성되면서 인천으로 이전을 했어요. 40여명의 직원이 생산한 고무제품을 지금의 한국지엠인 대우자동차에 납품하도 하고, 인쇄공장을 차려 김 포장지인 은박지도 만들었다.

 

사업수완이 있으신가 본데요?

▲ 웬걸요? 임대를 얻어 고무제품을 생산한 공장은 IMF때 폭삭 망해 기계만 겨우 건졌어요. 지금은 직원 13명을 둔 인쇄공장이 8도 자동컬러 기계를 보유한 주업이 됐고, 직원 9명이 운영하는 고무제품 생산공장은 부업으로 밀렸어요. 남동산단에 주유소도 있긴 하지만요.

 

사업을 하면서 향우회 일에 나서기 쉽지 않았을텐데요.

▲ 1980년대만 하더라도 재인충남향우회라고 모이는 지역은 서산과 당진, 예산 등지가 전부였습니다. 나머지 지역 사람들은 인천에 살더라도 향우회가 없어 모이지 못했어요. 공성운수 창업자인 고 심영섭(충남부여 태생)회장이 채근하셨죠. “대전을 포함해 인천에 사는 충남인들을 한번 지역별로 다 모이게 하자.” 1990년 충청도 출신 인천 공무원과 경찰의 도움으로 충남사람들을 찾아내고, 지역별로 나눴습니다. 각 시·군별로 향우회를 창립하는 계기가 된거죠.

 

충남향우들이 가장 많이 사는 구는 어디입니까?

▲ 현재 인천서 사는 충남향우들이 120만명으로 추산하고 있어요. 그 중 남동구와 남구, 연수구, 부평구 순으로 많습니다. 제가 사는 연수구는 전체 구민의 37~38%정도 됩니다.

 

누구보다도 충남향우회 일에 적극적이었는데, 어려움은 없었습니까.

▲ 5년간의 재인보령시민회 회장에서 초대 도민회사무총장, 상임부회장, 11·12대 수석부회장을 거쳐 도민회장에 선임되기까지 숱한 일을 겪었습니다. 향우회 고문들이 운영하던 사업체가 부도가 나는 것을 지켜보야만 했습니다. 하청업체로 일한 향우회원들이 겪은 어려움도 바로 옆에서 느꼈습니다. 부도가 난 효명건설 서택동(서산 출신)회장이 기억납니다. 서 회장이 잘 나갈 때 찾아가 뵙고 ‘향우회원을 하청업체로 써 달라’고 부탁을 한 적이 있습니다. 그때 서 회장이 한마디로 거절하더라구요. ‘내가 지금 그럴 입장이 아니다’라는 거예요. 그땐 오해도 적잖히 했죠. 먹고 살만하니까 고향도 저버린다고…. 하지만 그게 아니었어요. 2년쯤 지난 뒤 효명건설이 부도가 났어요. 만약 서 회장이 내 말대로 향우회원이 운영하는 업체를 하청으로 일을 시켜봤어요. 그 피해는 하청업체에 떨어지는 것 아닙니까? 내 욕심을 버리고 후배를 챙겨주는 것, 그게 고향 선배들이 해야 할 일이예요.

 

정치적으로도 발이 넓다고 하던데요.

▲ 박정희 전 대통령이 집권하던 시절, 재무부장관과 청와대 경제수석을 했던 김용환(81·보령 출신)전 국회의원과의 인연 때문이죠. 서울서 사업을 할 당시에도 서울에 사는 보령 출신 사람들과 자주 만나 모임을 가졌어요. 그 때 김 전 의원께서 내가 국회의원에 나올 것이라고 예상하고 견제를 하기 시작했어요. 내가 김 전 의원님을 찾아가 “절대 그런 일은 없을 겁니다”라고 약속했었요. 끝내 그 약속은 지켜졌고, 김 전 의원님과도 가까워졌고, 그 분이 10년 전 박근혜 한나라당 비대위원장을 소개해 1년이면 한두차례는 꼭 만납니다. 박 위원장의 특보단장을 맡고있기도 하구요.

 

장학재단의 활성화 방안은?

▲ 4년전 설립한 도민회장학재단이 보유하고 있는 자산은 12억입이다. 지난해 63명이 혜택을 받았습니다. 올해는 100명으로 늘릴 예정입니다. CMS을 통해 1구좌에 1만원씩 500구좌를 확보할 겁니다.

 

충남도민회장으로 꼭 하고 싶은 일은?

▲ 기숙형 학사관을 짓고 싶어요. 대전·충남에서 인천으로 오는 대학생들이 적은 부담으로 공부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하는 겁니다. 몇해 전만해도 충분히 가능성이 있었어요. 충남 천안서 사학재단을 운영하는 한화가 인천서 땅을 제공하고 뜻있는 향우회원들이 출연하면 가능한 일이었고, 협의도 어느정도 일궜습니다. 다시 추진할 겁니다. 시군별로 10명씩 추천을 받아 인천서 열심히 공부할 수 있도록 뒷받침하고 싶은 심정입니다.

글=박정환기자 hi21@i-today.co.kr

사진=이원구기자 jjlwk@i-toda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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