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대 들어 국내 인문과학계에서는 ‘근대성’이 핵심적인 논의거리로 떠오른다.
연구의 출발점에는 장성만이 놓여 있다. 그에 대한 평은 이렇다. “장석만은 근대가 그 속의 인간들에게 강요하는 억압, 그리고 그로부터의 탈출에 관심이 많다. 그는 제도의 바깥 지대에서 끊임없이 앎의 길과 삶의 길을 일치하려 노력한다.”

현 싯점 대표적인 인텔리겐차로 꼽히는 그가 인천 토박이로 인중·제고를 거쳤다는 사실을 아는 인천인들은 그리 많지 않다. 릴레이 인터뷰 첫 주자였던 조각가 정현이 ‘꼭 만나보라’고 소개한 연(緣)으로 극구 사양하는 그를 비로소 지면으로 불러냈다.

▲인문학과 공연예술의 연결

장석만의 학문적 통찰과 현실참여 방식에 접근하기 위해 최근의 관심사에서부터 이야기를 풀어갔다.
지난해 장 박사는 대학로 한복판에서 ‘충간문화연구소’를 열었다. 공연예술이 행해지고 있는 현장에서 문화·예술인들과 함께 ‘인문학과 공연예술의 다리놓기’를 풀기 위해서다.

“올려지는 연극은 외국 작품 일색이지요. 세계적인 맥락과 연결할 수 있는 우리작품의 부재에서 원인을 찾을 수 있습니다. 한국적인 문제의식속에서 넒은 포옹력을 갖는 것이 가능할까 고민을 시작했죠. 현재 갖고 있는 문제의식을 우리 삶의 표현으로 나타내야 한다, 어떤 방식으로 담아낼 수 있을 것인가 찾는 겁니다.”

사고가 같은 이들이 모여 논의에 논의를 거쳤다. 구체적인 성과는 아직 없지만 움직임이 보인다. 올 6월에는 첫번째 포럼을 열 계획이라고 말한다.

▲종교학과 근대성

그의 전공은 주변화된 인문학 중에서도 주변에 위치한 종교학이다. 학부시절부터 종교학을 시작, 대학원에서도 맥을 이어 지난 1992년 ‘개항기 한국의 종교 개념형성에 관한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로부터 촉발된 근대성 연구는 이후 국내 학계에 큰 영향을 미친다.

장 박사의 연구 족적을 따라가기 위해 빼놓을 수 없는 것이 ‘한국종교문화연구소’다. 1987년 그를 주축으로 종교학에 관심을 갖은 이들이 모여 출범, 올해로 어언 20년을 맞았다.

“종교를 대하는 태도를 두가지로 대별할 수 있습니다. 신성함으로 인해 감히 손댈 수 없다는 측과 결국 과학의 힘 때문에 없어질 수밖에 없는, 학문적으로 연구할 가치가 없다는 쪽입니다. 이지점에서 나를 포함한 종교학연구자들은 인간이 종교와 관련해 어떻게 반응하고 느끼는 것에 관심을 갖습니다. 우리 삶에 직접 영향을 미치기때문에 햇빛아래로 끌어내야 한다는 겁니다. 더구나 종교는 근대의 체제를 파악하기 위한 중요 고리입니다.”

따라서 그의 공부는 한국종교 현실을 비판하는 실천적인 과제와 결부되고, 한편으로는 과학과 대립해 주변으로 밀려난 듯한 종교가 실은 근대성의 한 징표임을 드러내는 일과 관계한다.
연구소 연구원들이 관심을 갖은 대상의 폭이 상당히 넓다고 말한다. 성과도 괄목할 만하다.

공부로 점철된 삶을 택한 이유를 묻자 답이 이렇다.
70년대 중·후반 학번인 그도 그시절 누구나 그렇듯이 소위 ‘운동권’으로 강집을 당해 군에 끌려갔다. “제대를 하고 학교로 돌아오니 학생운동 주도층이 달라져서 아는 얼굴이 없더군요. 소외를 느꼈어요. 현장을 택할까 고민했지만 대학원으로 방향을 정했습니다.”

종교학을 연구한다 했더니 이제 주위 친구들은 한결같이 종교학이 사회변화에 미치는 영향을 물어댔다. “답이 곤궁하더군요. 교수라는 지식인들은 이데올로기를 이용, 학문을 보편적으로 이야기하지만 뒤집어보면 이기가 깔려있습니다. 그들을 먹여살리는 것이 학문이 아닌데 말이지요. 사회학이든, 예술학이든, 종교학이든 그 개념은 무엇이며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우선 알아야 합니다. 나에게는 그것이 근대성에 대한 해제의 방식입니다.”

학위를 받을 때조차도 그런 논문이 무슨 필요가 있느냐며 한번을 퇴짜맞고 일부 내용을 빼고서야 통과했다. 말도 안되는 비판을 받는 것이 피곤하기도 하고, 일면 도피하고픈 마음이 얹혀져 미국 하버드대학 동아시아학과에 객원연구원으로 간다. 뒤이어 캐나다 벤쿠버 브리시티컬럼비아대학 아시아학과 객원연구원까지 4년을 떠나 있었다. ‘이때 공부를 많이 했다’고 툭 던진다.

▲인천에 대하여

한국에 근대문화가 들어온 19세기말이라는 지점에 관심이 머물러 있다보니 유입도시 인천에 대한 언급을 피할 수 없다. 더우기 여러 대가 살아온, 현재 살고 있는 고향이기에 호·불호를 떠나 연이 묶여 있다.

“적산가옥에서 자랐고 부친이 일본 유학을 다녀온 연유로 일본문화와는 어렷을 적 친근했어요. 또 주변에서 중국인들을 자주 대할 수 있었습니다. 일제시대 인천이야말로 한국의 레닌그라드로 불릴 만큼 새로운 문물에 대한 기폭제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근대문화가 들어와 변화되는 모습을 유추할 수 있는 단편 기억들을 여럿 지닐 수 있는 대목이지요.”

그러나 중학시절 기억은 온통 암울하다. 서울에서 살지 못하는 사람들이 밀려서 모여드는곳, 설상가상 북과의 냉전, 중국과 단절이라는 국제 정세로 인해 어느 한순간 갖힌 도시가 돼버렸다. 이 도시를 떠나 가능한 돌아보지 않으려고 한 무의식의 저변에는 그 시절이 버티고 있는 것이다.

장 박사는 최근들어 인천의 변화에 주목한다. 동북아 중심도시를 지향하면서 비로소 열린도시로 나가려는 기운이 느껴진다고 진단한다.
“이제 황해를 보는 시각을 달리하는 겁니다. 사람들이 살아가는 영역을 제대로 보려면 대륙 중심의 인식에서 탈피, 바다를 중심에 두어야 합니다. 당연히 바다가 갖는 문화적 연계를 살펴야 합니다. 전제는 인천이 중심이지요.” 가령 중국에 대한 이해의 접근방식은 황해에 접한 지역부터 출발해야 한다고 설명한다.

“무엇보다 문화를 연구하는 전문기관이 필요합니다. 그래야만 비로소 문화적 역량이 축적될 수 있지요. 장기적인 전망을 갖고 인천이 갖은 역사적·지리적 특성을 살렸으면 합니다.” 문화비평에 대한 글쓰기를 하는 사람으로서 인터뷰 말미에 당부를 붙인다.
김경수기자 ks@i-toda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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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석만은…
▲1955년 인천출생 ▲서울대 종교학과 졸업 ▲서울대 대학원 종교학과 박사학위 ▲하버드대학 동아시아학과 객원연구원 ▲벤쿠버 브리시티컬럼비아대학 아시아학과 객원연구원 ▲현재 사단법인 한국종교문화연구소 연구위원, 충간문화연구소 소장
다음주에 만날 사람 /조경만 목포대학교 인류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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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석만의 글쓰기>

장석만의 글쓰기는 종교학 관련 논문과 비평외에 전 분야에 걸쳐 있다. 논문뿐만 아니라 칼럼과 같은 잡문 등을 통해 사회에 기여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 그의 평소 소신이기도 하다.

특히 ‘이머지 21’에는 창간때부터 미디어비평을 쓰기도 했는데, 인문학연구자가 맡았다는 것은 비교적 드문일이다.‘전공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의 미디어비평을 읽어보면 과연 특이하다. 비평이 현상분석 위주로 하는데 반해 장석만은 미디어 권력과 미디어 현상에 대해 보다 인문주의적이면서도 근본적인 성찰의 자세를 보여준다. <이머지 21, 1999년 9월>

장석만은 차분한 논리전개와 조용하게 성찰적인 수사를 구사하면서도 때로는 그 내용이 급진적이다. 그러한 급진성은 한국사회가 내장한 치명적인 모순과 관련된 문제를 언급할 때 자주 등장한다.
이는 인문주의적 태도가 내포한 본연적 급진성이나, 부드러운 인상과 어조를 가졌지만 타협을 모르는 그의 성격과 관계가 있다. <아카필로, 200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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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주에 만날 사람 /조경만 목포대학교 인류학과 교수

내가 아는 조경만은…

한마디로 바다의 문제에 몰두하고 있는 사람이다. 평생 몰입한 생태인류학은 인간과 자연의 관계를 연구하는 학문이며, 따라서 그의 삶은 항구와 맞닿아 있다. 더 있다. 대학시절 맺은 농악과의 끈은 또 하나의 삶의 요소다. 그의 관심이 민중문화의 맥락에 항상 머물러 있게 하는 고리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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