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둘레길을 걷다] 9. 마을과 역

격세지감(隔世之感). 인천둘레길4코스에서 발을 들여 순간 드는 직감이다. 변해도 너무 많이 변했다. 똥지개꾼이 다녔던 한적했던 부평대로는 마천루 거리로 바뀌었다. 초가집 몇 채만이 있었던 백운역 일대는 수 만명이 사는 아파트 단지가 들어섰다. 호랑이가 나왔다는 산골짜기는 가족공원으로 꾸며졌다. 그 자리를 채우거나 떠나야만 했던 사람들은 울고 울어야만 했다. 그래서 4코스는 적잖은 이야기 거리로 채워지고 있다.

위험 화학물질 매립의혹으로 전국을 떠들썩하게 하고 있는 미군기지가 있었고, 그 틈새에서 먹고살기 위해 치열하게 살아왔던 이들의 사연들이 묻어나오는 곳이 4코스다.

‘하로나까’(弘中) 또는 ‘미쯔비시’(三菱)으로 불리는 부평2동 삼릉사택에서 경인국도를 따라 인천쪽인 부평삼거리쪽으로 가면 호명사(虎鳴寺) 고개를 넘자마자 남쪽 작은 골짜기로 들어가는 마을이 있다. ‘희망촌(希望村)’이다. 해방 뒤 부평은 미군 보급창인 에스캄으로 전국 각지에서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자연스럽게 새로운 마을도 생겼다.

하지만 유독 이곳만은 1950년대까지 그대로였다. 쓸모없이 버려진 산골짜기 땅 그 모습이었다. 1960년쯤이었다. 이승만대통령의 하야로 자유당 정권이 무너지고, 민주당이 정권을 잡았다.

▲ 백운역 일대 과거 모습
그간 삼릉사택에 거처를 두고 자유당 정권에 꾸준히 항거해 온 민주당 김훈(金勳)씨가 국회의원에 당선됐다. 부평 역시 민주당이 힘을 쓰기 시작했다. 서민층의 추앙을 받던 김훈 의원과 십수년간 뜻을 같이 해온 원종국(元鍾國)씨는 국회의원 수석비서로 총참모 역할을 했다. 하지만 그 형편은 말이 아니었다. 집 한 칸 없이 남의 집 셋방살이를 전전했다.

찾아오는 손님도 많아 내 집 한 칸이 아쉬웠으나 가진 것이 없는 터라 어쩔 수 없었다. 궁리한 끝에 이곳 버려진 골짜기에 집을 했다. 친지들의 도움으로 김훈 의원 집과 가까운 곳에 판잣집을 지었다. 그 뒤 같은 처지의 사람들이 모여 달동네를 이뤘다. 원씨는 이 달동네에 이름을 붙였다. ‘다 같은 처지에 좌절하지 말고 힘을 합쳐 희망을 일구자’는 뜻에서 ‘희망촌’이라고 이름지었다.

4코스 주변에는 희망촌 말고도 튀는 마을 이름이 있다. 부평동 283 일대에 새 마을, 신촌이다. 본디 이곳은 경인철도 옆 원통천 서쪽에 있는 잡초 무성한 펄이었다.

부평 전체가 인천부에 편입된 1940년, 조병창의 확장공사와 때를 같이 해 바로 원통천 개울 건너 경인철도변에 하로나까’라는 군수업체 공장이 세워졌다. 이 공장에 공원으로 들어가기만 하면 징용이 면제됐다. 역시 전국 각지의 젊은이들이 모여 들었다. 일하다가 잘리기라도 하면 곧장 탄광 등지로 끌려 가 ‘죽어라’고 일했다. 처자식을 시골 고향에 두고 온 직원들은 식솔을 불러들여 살림을 차릴 생각에 공장 옆 불모지에 집을 짓고 살기 시작했다.

하로나까 공장이 2년 뒤 미찌비시로 넘어가면서 이름도 바뀌었다. 해방 뒤에는 한국군 80정비부대가 들어섰고, 지금의 부평공원 일대다. 미군부대가 떠나면서 그 자리에 현대건설이 인구 5만명을 수용할 수 있는 대형 아파트 단지를 지으면서 신촌의 옛 모습은 사라졌다.

대규모 아파트단지가 들어서면서 1984년 11월20일 경인전철 건널목에 백운역이 생겼기는 계기였다. 원래 이곳은 ‘작은 원통이고개’로 불리는 작은 길로 인가조차 없던 곳이다. 북쪽은 지형이 낮고, 남쪽은 원통산 줄기로 큰 길이 생겨 유난히 높은 구름다리를 놓았다. 역의 이름을 지을 때 중론에 붙여였다. ‘신촌역’, ‘십정역’ 등도 거론됐다. 하지만 높은 구름다리를 상징해 ‘높이 뜬 구름 같다’고 해서 ‘백운역’(白雲驛)이라 지었다.

이곳에서 열무물 고개까지 채석장이 많았다. 건설공사가 생기면 으레 이곳에서 돌을 캤다. 동산이 평평한 땅으로 변하자 주택단지가 들어섰다. 역시 그 이름도 ‘백운주택’이었다.

부평역 광장에 큰 로타리가 있었다. 일제강점기 때 일본은 동양 침약의 일환으로 부평을 조병창을 비롯해 군수보급기지로 활용했다. 그러면서 그 관문인 부평역을 확장했다. 로타리도 만들었다. 당시에는 동양 최대로 불렸다.

인천 최초의 팔각정도 부평역에 세워졌다. 해방 후 남산에 팔각정을 세우자 전국 각지에서 앞을 다퉈 팔각정을 만들얶다. 아파트단지 공원은 물론 심지어 관광지의 매점까지 팔모정으로 꾸몄다.

부평에 팔각정이 세워진 거은 1970년 쯤이다. 당시 부평 안병원(현재 세림병원) 원장 안승택 박사가 직장새

▲ 현재 백운역 모습
마을에 봉사한 공로로 대통령 표창을 받았다. 이를 기념하기 위해 사비를 들여 부평역 광장에 팔각정을 세웠다. 이것이 인천 팔각정의 시초라는 것이다. 이 팔각정은 노인들의 차지가 됐다. 술을 마시고, 추태를 부리는 노인들이 꼴불견이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항상 인파가 몰리는 역의 팔각정은 손가락질의 대상이었다. 얼마 안 가 부평역 지하도 공사를 하면서 팔각정 쉼터도 사라졌다. 이후 인천시는 만월산 정상과 계양산 고성 옆에 팔각정을 세웠다.

동암역(銅岩驛)도 얘깃거리다. 구 주변에는 석바위(石岩)과 돌말(石村) 등 바위 이름을 딴 마을이 많아 흔히 동쪽에 있는 바위에서 비롯된 이름으로 착각하기 쉽다. 동암은 ‘東岩’이 아니라 ‘銅岩’이다. 만월산은 원래 주안산(朱雁山)으로 표기되곤했다. ‘붉을 주’자를 쓴 가닭은 흙이나 바위가 모두 붉기 때문이었다. 흙과 바위에 구리(銅)나 쇠(鐵)성분이 많아서였다.만수동 846 일대에 14만8천500㎡규모의 광업소가 있었다. 1954년 염모씨 등이 광업권을 출원한 곳이었다. 1960년 자원개발연구소의 전신인 국립지질연구소가 이 일대를 굴착 탐사한 결과 60%이상의 고품질의 철광석이 있다는 분석을 내놓았다. 1967년에는 이곳에 경인철광㈜를 세우고, 부평영업소를 설치했다. 1972년에는 영풍상사㈜에 합병돼 17년 동안 채광해 오다가 1989년 폐광했다. 이곳서 채굴한 광물은 철과 동을 비롯해 금·은·아연 등이었다. 동암이 ‘東岩’이 아닌 ‘銅岩’일 수 밖에 없는 이유다.

부평삼거리에서 동쪽에는 큰 골짜기가 있다. 지금의 인천가족공원이 있는 곳으로 고려의 개국을 기리는 ‘개국사(開國寺)’라는 절이 있던 골짜기였다. 부령약수 동쪽 산 중턱 100m 지점에 개국사 터의 흔적이 남아있다. 지금도 절터라고 부르는 이유다.

북쪽에는 주안산(만월산)과 금마산, 동쪽은 부개봉 산줄기가 돌아 아늑한 골짜기를 이룬다. 옛날에는 숲이 우거져 호랑이도 살았다고 전한다. 일신동인 황굴의 서채량(徐采亮)이라는 사람의 얘기가 부평사에 전해오는 곳이기도 하다.

서씨는 어머니의 병을 고치기 위해 이곳 골짜기를 찾았다. 호랑이를 잡기 위해서였다. 호랑이 간을 어머니에게 들여 병을 고쳤다. 호랑이 가죽은 방석을 만들어 어머니에게 드렸다. 순조는 서의 효성에 감복해 정려문을 내리고, 통훈대부의 사헌부 감찰 자리를 주었다.

123만㎡에 이르는 이 가족공원은 1947년 11월22일에 처음 조성되기 시작했다. 종전 주안동과 계양산성, 추곶산 일대 공동묘지를 폐쇄하고 이곳으로 옮겼다. 1977년에는 구 주안동에 설치(1936년)했던 화장장을 이곳으로 이전하고 , 납골당을 설치했다. 1987년에는 특이한 모양의 중국인 묘역이 조성돼 남구 도화동 일대에 흩어져 있던 묘지 2천500기를 이전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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