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적으로 인정받는 한 노학자가 8년만에 자신의 논문을 철회했다.

계속된 연구 과정에서, 당시 논문에서 주장한 이론에 일부 오류가 있어 이를 바로잡겠다며 한 행동이다.

과학자로서 당연한 일이 새삼 크게 느껴지는 것은 ‘황우석 논란’ 이후에도 한국과학계의 비도덕성 문제가 끊이지 않고 있는 탓이다.

이 노학자는 항상 정직을 강조한다. 거짓은 언젠가는 꼭 밝혀지기 때문이다.

가천의과대학 뇌과학연구소 조장희(70) 소장은 지난 1998년 3월 미국 국립 과학원회보(PNAS)에 특정 침점(경혈)에 침을 놓으면 뇌 부위가 활성화 된다는 내용의 논문을 게재했다.

이 논문은 ‘침술과 침점의 효과’를 과학적으로 입증한 첫번째 연구성과로 주목을 받았다.

조 박사는 그러나 지난 7월 PNAS에 새로운 논문을 발표하며, 8년전 발표한 논문을 철회했다.

조 박사는 “계속된 실험 결과 특정 침점에 침을 놓아야만 효과를 내기보다는 침의 강도와 주기, 빈도 등에 의해 효과가 결정되는 측면이 강한 것으로 나타났다”고 밝히며, “그러나 이번 논문 취소가 아주 오랜 경험에서 찾아낸 침점의 효과를 부정한 것은 아니다”고 강조했다. “아무데나 침을 놓는다고 효과가 있다는 것은 아니다”란 설명을 덧붙였다.

노학자의 이번 논문철회는 예고된 것이었다.




1998년 논문 발표이후에도 침술과 뇌 작용에 관한 연구를 계속해 오던 조 박사는 4년전쯤 새 논문에서 주장한 내용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는 실험 결과를 발표한 바 있다.

당시에는 그의 행동이 주목받기 보다는 ‘아무데나 침을 놔도 된다’식으로 언론과 사회가 확대 해석했다.

그는 새 논문 발표 이후에도 관련 연구를 계속 진행할 것이라고 밝혔다.

그런데도 이제와서 조 박사의 논문 자진철회가 새삼 중요하게 받아들여지는 것은, 지난해 불거진 ‘황우석 박사의 논문 조작’ 논란과 그 이후에도 끊이지 않는 한국 과학계의 비도덕적 관행 탓이라 하겠다.

노학자는 항상 ‘정직함’을 강조한다.

미래의 과학자를 꿈꾸는 어린 학생들에게도, 그가 몸 담고 있는 가천의대 뇌과학연구소 연구원들에게도 ‘정직’을 이야기 한다.

학생들에게는 “정직한 마음으로 뭐든지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은 열심히 하면 훌륭한 과학자가 될 수 있다”고 말한다. 연구원들에겐 정직과 신뢰를 실천하게 한다.

그런 이유에서인지 640억원이란 어마어마한 돈이 투자된 이 연구소에서는 연구원들이 결재를 받기 위해 바쁜 시간을 허비해가며 몇시간 동안 결재를 기다리는 모습을 찾아볼 수 없다.

노학자가 만든 결재 방법은 ‘말’이다. 말 한마디면 된다.

이는 조직 내부의 구성원들의 ‘정직함’과 이를 바탕으로 쌓인 구성원간 ‘신뢰’가 있기에 가능한 구조인데, 조 박사는 “작은 조직이기에 가능하다”고 밝혔다.

작고 전문화한 조직이 갖는 ‘효율’을 강조한 그는 공룡처럼 거대해져 비효율적인 조직인데다, ‘상아탑’을 내세우며 변화하지 않고 머물러 있는 한국 대학들의 문제점을 꼬집었다.

노학자가 몇년 전 한국행을, 그것도 서울도 아닌 인천에, 더군다나 국내 의과대학으로서는 41번째인 ‘꼴찌’ 대학의 연구소를 선택했을 때 주변에서는 “왜 그런 곳을 가는가”하는 우려의 목소리가 많았다.

그러나 지금은 다르다. 노학자가 “단군이래 최대의 기회”로 본 뇌과학연구소는, 삼고초려 한 가천길재단 이길녀 회장의 전폭적인 지원이 더해져 “획기적인 투자”라는 부러움의 눈길을 끄는 곳이 됐다.

그 또한 “예전에는 돈(연구비)을 따오기 위해 여기저기 찾아다녀야 했다”며 “뇌과학연구소는 (연구에) 필요한 돈을 미리 준비해 놓고 출발했다”고 말했다.

이는 세계 어느 곳에서도 좀처럼 찾아보기 힘든 사례이며, 조 박사 스스로도 “(뇌과학연구소를 맡은 일이) 운이 좋았다”고 평했다.

조 박사는 늘 이야기 하는 것 처럼 “아이디어와 시기와 돈, 이 삼박자가 딱 맞아 떨어진” 뇌과학연구소는 과학자라면 누구나 하고 싶어했지만, 돈과 시기가 맞아 떨어지지 않아 시도하지 못했던, 뇌의 신비를 풀어줄 프로젝트를 진행중이다.

PET(양전자단층촬영)-MRI(공명영상장치)·CT(컴퓨터단층촬영) 퓨전영상시스템이 전세계 과학자들의 관심을 끄는 것도 이런 이유다.

뇌과학계와 의학계는 이 시스템이 완성되면 뇌종양 환자의 종양 위치는 물론, 양성인지 악성(암)인지를 한번에 파악하고, 종양제거 수술 후에도 실시간으로 상태를 볼 수 있어 환자의 복지 수준을 높이고, 의료사고도 획기적으로 줄일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

특히 치매나 중풍, 뇌출혈, 파킨슨병, 정신분열증 등 각종 뇌질환을 조기에 발견하고 치료하는데에도 이 시스템이 큰 도움을 줄 것으로 내다본다. 시장성을 따져놓고 보면, 연간 20억 달러 규모에 달한다.

뇌과학연구소는 2008년 이 시스템을 완성한다는 목표다. 조 박사는 이 목표를 달성하는데 자신한다.

최근 뇌과학연구소는 조 박사의 표현대로 현재까지의 기술로는 ‘볼 수 없었던 것을 보는데’ 성공했다.

이번에 촬영한 뇌 부위는, 호흡을 관장하는 핵심중추인 뇌간 부위 미세신경다발과 뇌출혈을 흔하게 일으키는 혈관인 뇌 시상 부위 미세혈관이다.

미세혈관은 지름이 0.3~0.6㎜에 불과해 혈관조영술이 아니면 관찰이 어려웠다.

하지만 조 박사팀이 만든 ‘헤드 안테나’가 위험이 따르는 혈관조영술보다 더 선명한 뇌 영상을 촬영하는데 일조했다. 세계 최초다.

노학자는 “한국의 대학들이, 특히 공과대학들이 세계가 어떻게 돌아가지는지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응용학문은 끊임없이 생겨나고 없어진다.

교수들도 상아탑에 안주하지 말고, 새로운 것을 계속 공부하고 기존에 있는 것과 접목(융합)해 새로운 것을 만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럴 때만이 세계적인 경쟁력을 갖출 수 있다고 강조했다.






조장희 소장은···

1936년 서울에서 태어났다. 서울대 전자공학과 시절, 산악부 회장을 맡을 정도로 대학때 등산을 좋아했다.

찢어진 바지를 입고 바위에 서 친구들과 기념촬영한 사진을 보여주던 그는 “군대 제대후 산에 함께 오를 친구들이 없어 공부를 시작했다”고 말했다.



서울대 전자공학과에서 석사과정을 마치고, 전공을 바꿔 유학한 스웨덴 웁살라대 응용물리학과에서 물리학 박사학위를 땄다.

미국으로 건너가 1975년 미 LA캘리포니아주립대(UCLA) 조교수로 있으면서 암세포를 찾아낼 수 있는 진단장비인 PET를 세계 최초로, 1985년에는 2.0T(테슬러)급 초전도 MRI를 개발했다.

현재 가천의대 뇌과학연구소의 PET-MRI·CT 퓨전영상시스템 개발 가능성이 높은 것도 조 박사의 독특한 이력 때문이다.

카이스트 초빙교수 때에는 미국과 한국을 비행기로 오가며 연구하고 강의했다.

2005년 대한민국 과학기술 창조상을, 2006년 서울대학교 관악대상을 수상했다.

조 박사는 “지능지수보다는 자기 스스로 좋아하는 것에 몰두한 결과 지금의 내가 있다”며 과학자를 꿈꾸는 학생들에게도 “자기가 하고 싶고 좋아하는 것을 열심히 해라. 열심히 하다보면 기회가 많아진다”고 조언했다.


뇌과학 연구소 지금···

뇌의 신비 벗겨줄 프로젝트 진행중

지난 4월20일 남동구 구월동 길병원 단지내에 문을 연 가천의대 뇌과학연구소는 베일에 감춰진 ‘뇌의 신비’를 벗겨줄 거대한 프로젝트를 진행중이다.

‘PET-MRI·CT 퓨전영상시스템’이 그것인데, 이는 각기 다른 기기의 장점을 더한 제5세대 기술로 평가받고 있다.



PET와 MRI 가운데 가장 성능 좋은 기기가 각각 ‘HRRT-PET’와 ‘7테슬라 MRI’이며 모두 연구용이다.

각각 수백억원에 달하는 이들 기기는 세계 7곳의 연구소에 설치돼 있는데, 두 기계가 모두 설치된 곳은 가천의대 뇌과학연구소가 유일하다.

PET는 뇌세포의 유전자와 분자과학적 변화, 다시말해 뇌 속의 암 덩어리 존재여부를 확인할 수 있다.

하지만 영상의 해상도가 떨어져 질병의 정확한 위치를 찾기 어려웠다. 반면 MRI는 뇌의 단층을 촬영해 해상도가 높다.

이 두 장비를 융합시킨 것이 바로 ‘PET-MRI·CT 퓨전영상시스템’이다.

최근 조 박사팀은 이 시스템으로 뇌 속 미세혈관을 촬영하는데 성공했다. 조 박사팀이 만든 우주인 헬멧 모양의 ‘헤드 안테나’가 큰 역할을 했다.

이 퓨전영상시스템은 뇌 관련 질병을 치료하고 예방하는데 큰 도움을 줄 것으로 기대된다.

뇌과학연구소는 이 뿐만 아니라 사람이 생각을 하거나 행동할 때 실제로 활동하는 뇌 영역을 정확하게 확인하는 연구도 하고 있다.

최근 그동안 인지(認知) 과학 연구에 이용돼 온 fMRI에 오류가 있음을 처음으로 입증하기도 했다.

조장희 박사를 비롯해, 의학, 전자공학, 물리학, 컴퓨터 프로그래머 등 다양한 전공자 40여명이 뇌과학연구소에서 일하고 있으며, 서울대와 연세대 등 국내 많은 대학과 공동연구도 진행중이다. 김주희기자 juhee@i-toda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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