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권과 타협하던 야당과 차별선언

재야·노동자·학생운동권 '총집결'

86년 5월3일, 신민당의 개헌추진 현판식이 예정된 인천시민회관에 대회 시작 2시간 전인 12시경 부터 시위대가 밀려들기 시작했다.

인천지역노동자연맹(인노련)과 서울노동운동연합(서노련), 인천기독교노동자연맹(인기노련)이 중심이 돼 주안역부터 행진한 노동운동진영은 시민회관에 이르러 1천여명이 대오를 이뤘다.

재야와 학생들만의 것으로 여겨졌던 가두시위에 노동자들이 앞장 선 것이었다.

인천사회운동연합(인사연)도 곧이어 주안1동 성당에서 출발하여 500여명이 ‘독재타도’ 등의 구호를 외치며 시민회관으로 진출했다.

주안사거리와 신기촌 쪽에서도 학생 수천명이 ‘광주학살 배후조정 미제축출’ 등을 외치며 시민회관으로 모여들었다.

오후 1시 경 시민회관 앞 사거리는 시위대에 점거돼 구호와 함성, 광주출정가 노동해방가 등 노래소리로 뒤덮였고 시위대는 눈덩이 처럼 불어났다.




거리를 가득 메우며 개헌추진 현판식에 몰려든 시위대와 대중들. 개헌추진으로 열려진 공간에서 대중은 온전한 민주사회의 도래를 열망했다. 사진제공 =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인사연이 시민회관 앞에서 주관한 ‘민주화촉진 시민대회’에는 이호웅 의장과 민통련의 장기표, 광주항쟁 관련자 정동년 등이 ‘군사독재 타도하고 민중민주정부를 수립하자’ ‘광주학살 책임지고 전두환을 물러가라’며 연설했다.

이와 별개로 노동단체의 시위대는 ‘노동자가 주인되는 삼민헌법 쟁취’ ‘속지말자 신민당’ 등의 구호를 외쳤다.

뒤이어 인근 민정당사가 불에 타고 신민당 승용차와 경찰 타이탄트럭 등도 불에 탔다.

경찰은 오후 6시쯤에서야 최루탄을 무차별 난사하며 전격 해산에 나섰다.

최루탄과 화염병의 공방전은 이때부터 절정을 이뤄 10시까지 산발시위로 이어졌다.




경찰과 대치한 시위대. 경찰은 오후 6시쯤 최루탄을 무차별 난사하며 시위대를 해산하기 시작했다.

노동자가 40만이 넘는 인천과 서울의 운동단체들이 총집결하다시피 한 5.3 인천항쟁은 80년 5월의 광주 이후 군사독재 정권에 대항한 가장 큰 민중투쟁이었다.

인천항쟁은 또한 재야, 노동자, 학생운동권이 정권과 타협적 자세를 취하던 야당과 차별화를 선언하고 각기 실체를 갖춰 민주 변혁운동에 주도적으로 나서기 시작한 사건으로 평가할 수 있다.

신민당이 2.12 총선 1주년을 맞아 개시한 직선제 개헌서명운동은 자유와 민주에 목말라했던 대중에 있어 ‘대통령 선출방식의 정상화’ 운동 이상의 사회변혁운동을 의미했다.

86년 3월1일 개헌현판식이 서울에서 시작해 3월30일 광주대회에 이르렀을 때 모두의 예상을 뛰어넘어 30만명에 이르는 대중이 폭발적으로 집결했다.

개헌 서명운동으로 열린 마당에 모여든 민주화 열기는 놀랄 만큼 고양돼있었던 것이다.

이는 개헌운동이 신민당의 독자행사를 넘어서 군부독재타도와 민주헌법쟁취 투쟁으로 이어져야한다는 강렬한 메시지였고 인천대회는 이에 결실을 맺어야 할 격전지였다.




민주 개헌 쟁취를 외치며 가두행진하며 시위를 벌이고 있는 김영삼 이민우와 신민당 의원들.이들은 이날 시위대에 밀려 예정된 개헌 현판식을 갖지 못했다.

대중적 개헌투쟁이 급속이 확산되자 전두환 정권은 연초 선언한 ‘임기내 개헌불가’에서 후퇴해 개헌논의를 제도 정치권 안으로 끌어들였다. 신민당과 민주화 운동세력간 분열을 의도한 것이었다.

4월30일 청와대 회담에서 전두환은 신민당에게 이같이 부분적인 정치적 양보를 하면서 개헌논의는 할 수 있으나 가두서명운동은 중단할 것을 요구했다.

이 타협과 함께 ‘일부 소수학생의 과격한 주장은 지지할 수 없다’는 신민당 기자회견은 ‘반독재 저항연대’의 동요를 불러 민통련이 신민당과의 연대기구(민주화를위한국민연락기구)에서 탈퇴하는 결과를 빚었다.

그러나 이 즈음 재야 등 민주화운동권에서도 신민당과의 차별성과 관련해 심각한 노선차이가 있었다.

인사연등 민통련 지역운동단체들은 대체로 신민당과의 차별성은 부차적이며 군사독재 타도 투쟁이라는 과제에 집중해야한다는 것이었으며, 노동운동권이나 일부 학생운동권은 신민당과의 차별성에 중점을 둬 운동을 전개했다.

신민당은 외세나 독재권력 전체와 결국 유착되는 세력이라는 입장이었다.

이같은 노선차는 5.3대회에서 적나나하게 표출돼 운동세력간 공동투쟁은 실패로 돌아가고 시위도 따로 전개돼 혼란을 가중시켰다.




정권과 타협했다며 신민당을 부정하는 현수막을 펴들고 참여한 시위대.

전두환 정권은 이때 5.3 항쟁을 국면 전환용으로 이용하여 민주세력을 좌경 폭력세력으로 몰며 대대적인 탄압에 돌입했다.

경찰은 이날 4백여명을 연행, 133명을 소요죄와 집시법 위반으로 구속하고 50여명을 수배했다.

정권은 언론의 ‘보도지침’을 통해 이들을 ‘좌경 용공 극렬분자’로 매도했다. 구속된 시위자 일부는 대공분실에 끌려가 심한 고문을 당하기도 했다.송정로기자 goodsong@i-today.co.kr






85년 2·12 총선에서 87년 6·10 항쟁까지

80년대 민주화운동사에 있어 86년 인천 5.3은 그 중간역 쯤 위치한다.

5.3 이전인 85년 2월12일엔 중대한 정치적 사건이 된 제12대 총선이 실시됐다.

그 결과는 전두환 정권의 철권정치에 조종(弔鐘)을 울리고, 고비에선 민주세력에게 민주화의 대장정을 본격화하는 예포(禮砲) 같은 것이었다.

대중은 여당도 아니고 제1야당도 아닌, 규제에서 풀린 정치인들이 급조한 신민당에 표를 몰아줬다.

그 속에는 기존의 정치 사회질서를 거부하는 엄중한 변혁의 목소리가 담겨있었다.

인천의 투표율은 80.7%로 60년대(6대 총선) 이후 최고의 기록이었다.

신민당 명화섭(남구, 중구)은 12만8천382표를 얻어 6선 관록의 민한당 김은하(7만4천793표)를 큰 표차로 낙선시키며 당선됐다.

유제연(북구,동구)은 11만3천420표로 민정당 후보을 제치고 1위로 당선됐다.

신민당 돌풍이 일면서 득표율은 여촌야도(與村野都) 현상이 뚜렷해졌다.

1구 2인을 뽑는 중선거구제 하에서 인천과 서울 부산 대구 등 4대도시에서 여당 20명, 야당 28명이 당선됐다.

이는 민주화 운동진영에 용기와 각성을 부르는 계기가 됐다.

독재 타도와 민주화운동을 열망하는 시민사회에 역동성이 일기 시작한 것이다.

2.12 총선 민심은 이듬해 3월 불붙기 시작한 개헌운동에 모아졌다.

민중들은 대통령 직선제 이상의, 온전한 민주화의 도래를 열망했다.

그러나 그 막바지에 이른 인천 5.3 항쟁에서 그것은 유보됐다. 전두환 정권은 5.3을 이용하여 민주세력에 대한 대대적인 탄압을 가했다.

그러나 5.3 인천항쟁 수배자에 대한 검거 선풍은 6월 ‘부천서 성고문 사건’으로 이어져 권력의 도덕성에 큰 타격을 입힌다.

87년 1월14일 물고문으로 서울대생 박종철군이 숨지는 사건이 일어났다.

여전히 대통령 직선이냐, 간선이냐를 놓고 주고받던 때, 그 파장은 추모대회와 평화대행진으로 이어지면서 ‘민주헌법쟁취를 위한 국민운동본부’라는 범국민적 기구를 탄생시켰다.

이런 흐름에 다시 위기를 느낀 정권은 4월13일 유화조치가 아닌 호헌조치를 발표했다.

그러나 호헌반대 여론이 각계각층으로 번지면서 교수, 교사, 시민단체, 예술인 등이 잇따라 성명을 발표하고 나섰다.

그러던 중에 6월9일 연세대생 이한열군이 최루탄에 맞아 숨지는 사건이 벌어졌다.

6월10일 민정당이 노태우 대표위원을 대통령후보로 추대하던 날, 전국에서는 독재타도와 직선제 쟁취의 함성이 온종일 울려퍼지기 시작했다.
송정로기자 goodsong@i-today.co.kr







5·3항쟁 참여 정동근씨

“사회운동(재야)과 노동자, 학생이라는 세축의 변혁세력이 통일되지 못한 형태로 시위를 벌였지만, 이들이 한 자리에서 함께 외친 공통의 목소리는 반독재 민주화였습니다.”

정동근씨(52)는 5.3 현장에 해고자 신분으로 참여했다.

감옥에서 나온지 9일 만이었다. 부평 동보전기 노동자였던 그는 85년 12월 임금체불과 민주노조 탄압에 대항해 동보전기 점거농성을 벌이다 노동쟁의조정법 위반 등의 혐의로 구속되고 해고됐다.



“노동운동 진영에서는 ‘노동운동 탄압분쇄’, ‘민중생존권 확보’, ‘삼민(민족 민주 민중)헌법 쟁취, 민중정권 수립’을 외쳤습니다”

그에 따르면 5.3 현장에서 민통련과 인사련을 중심으로 하는 사회운동 진영은 ‘직선제 개헌’, ‘보수대타협 분쇄’, ‘신민당 각성’, ‘민주정부 수립’을 주요 내용으로 평화, 연좌집회로 이끌었다.

민민투, 자민투를 중심으로 하는 학생운동진영은 전투조와 시가행진조로 나뉘어 ‘미일외세축출, 군부파쇼타도, 민주헌법쟁취’를 중심 슬로건으로 시위를 벌였다.

5.3에 참여한 ‘조직 대오’로 사회운동 진영 1천여명, 노동운동 2천여명, 학생운동 4천여명으로 추산하고 신민당원 등 나머지 주체들을 2천여명으로 추산했다.

그래서 1만여명은 조직적으로 참가했고 일반 시민 대중까지 합쳐 모두 5만여명이 참여한 것으로 그는 꼼꼼이 분석해놓고 있었다.

사회, 노동, 학생운동의 전술과 사상, 이론적인 차별성이 존재하는 가운데서도, 그리고 사전에 충분한 논의도 부족한 상태에서 ‘독재타도와 민주쟁취’를 위해 수도권 운동진영이 총집결한 것이었다.

“1시20분경 10여명의 시위대가 귀빈예식장 앞 민정당 지구당사에 돌을 던지며 진입을 시도하자 기다렸다는 듯이 최루탄이 우박처럼 발사됐습니다.

그후 6시10분경 신민당의 현판식 대회 연기 공식발표와 함께 경찰이 본격적인 해산에 나섰습니다.”

그후 시위대는 주안역, 동인천역, 용덕마루, 화평교, 축현초교 등지서 경찰과 투석전을 벌이다 오후 10시경 석바위에서 200여명이 남아 해산집회를 갖고 11시간여의 긴 투쟁에 종지부를 찍었다고 그는 술회한다.

그는 5.3에 대해 노동자 등 대중들이 스스로 반독재 민주화를 위한 조직적 정치투쟁에 본격 나서기 시작했다는 데 의미를 뒀다.

이때부터 민중들이 정치투쟁에 주체적으로 나서 결국 87년 6월 항쟁으로 연결될 수 있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는 5.3이 아직 역사적으로 그에 상응하는 평가받지 제대로 받지못하고 있다며 이제는 마땅한 자리매김이 있어야한다고 강조한다.
송정로기자 goodsong@i-toda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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