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의 특별한 영화]라밤바

1987년 나는 대학생이 되었다. 유학생이었던 나는 먹고 자는 문제를 혼자 힘으로 해결해야 하는 고달픈 신세였다. 여기저기 기웃거리다 학보사에 들어갔다. 숙식이 해결되고 원고료 같은 부수입도 생겼다. 오갈 데 없는 촌놈에게 학보사는 안락한 보금자리였다.

서울올림픽이 열리던 해 신학기 어느 봄 날. 편집회의를 앞두고 학보사에서 빈둥거리고 있을 때 막 문화부 기자로 명(命) 받은 동기생이 우리들을 불러 모았다. 공짜로 영화를 보러 가자는 것이었다. 대학 신문 문화면에는 한 꼭지씩 ‘영화평’이 실렸는데, 영화사 관계자들이 신작 영화를 홍보하기 위해 대학 신문 문화부 기자 앞으로 시사회 티켓을 보냈던 모양이다. 나를 비롯한 동기생 여럿이서 시사회장으로 날랐다.

그 날 우리가 시사한 영화는 ‘라밤바’였다. 멕시코에서 미국으로 이민 온 팝가수 리치 바렌스의 짧은 일생을 다룬 영화다. 일말의 불안함이 없지 않았지만, 넓은 좌석에 편안히 기대앉아 영화를 관람했다. 시사회는 예상보다 길어졌고 편집회의 시간은 다가오고 있었다.

학보사와 산악부, 응원단은 대학사회 안에서 군기가 세기로 유명하다. 하늘이 두 쪽 나도 정한 날짜와 시간에 신문은 나와야 하기 때문에 규율이 엄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 선배들의 철석같은 믿음이었다.

영화가 끝난 뒤 급히 학보사로 향했으나 제 시간에 도착하기에는 이미 늦은 시간이었다. 그 때는 공중전화 밖에 없던 시절이었다. 공중전화로 저간의 사정을 전했으나, 분위기는 싸늘했다. 신학기는 편집국장이 교체되고 뭔가 새롭게 ‘전의’를 다지는 시기여서 회의는 안중에도 없고 몰려다니며 영화나 보는 후배들의 행태는 불온한 집단 항명으로 비화되고 있었다.

자라목을 하고 학보사로 기어들었다. 역시 선배들은 흥분해 있었다. 바로 신문발송실로 집합. 신임 편집국장은 광화문의 이순신 장군 같은 폼새로 긴 ‘빳다’를 옆에 차고 있었다. 동기생 중에는 여학생도 두엇 있었는데, 원래 학보사에 여자는 존재하지 않았으므로 공평하게 쌍욕과 빳다를 나누었다. 공짜 영화의 대가는 결코 헐하지 않았다. 며칠 후 서울에서 곱게 자란 동기 여학생 둘은 온다간다 말도 없이 학보사에서 사라졌다.

그 후로도 우리는 기자증 하나 달랑 들고 시사회장을 자주 들락거렸다. 대학 생활에서 유일하게 누릴 수 있는 호사였다. 영화는 우리가 보고 ‘영화평’은 비판적인 내용으로 청탁하는 식으로 삐딱한 대학 신문의 논조를 유지했다. 시사회의 취지를 배반당한 영화사 관계자들도 눈치를 챘는지 더 이상 공짜 티켓을 보내오지 않았다. 공짜 영화를 주선했던 그 친구는 전공을 바꾸어 연극영화과를 졸업하더니 지금은 영화 제작일을 하고 있다.

얼마 전 TV에서 ‘라밤바’를 다시 봤다. 리치 바렌스에게는 부유한 집안의 백인 여자 친구 도나가 있었다. 도나 아버지의 반대로 두 사람은 자유롭게 만나지 못한다. 리치 바렌스는 자작곡 ‘오~ 도나’를 공중전화 부스에서 기타를 치면서 도나에게 들려주며 자신의 마음을 전한다. 눈물 흘리는 도나. ‘오~ 도나’는 ‘라밤바’와 함께 리치 바렌스의 대표곡이다. 리치 바렌스는 비행기 사고로 19세에 요절했다. 대학 당시 우리 또래였다. 최성곤 와이즈만영재교육원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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