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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민주화운동사(3편)-인하대 유신철폐 시위사건
학생, 재야의 치열한 유신반대 운동에 위협을 느낀 박정희정권은 74년 1월 긴급조치 1,2호를 발동하고, 4월 발생한 민청학련 사건과 함께 긴급조치 4호를 발동했다.

75년 5월 발동된 제9호는 학생들을 겨냥해 집회, 시위, 정치관여행위 금지를 명문화시켜 대학가의 민주화 요구를 철저히 억압했다.

학원에는 경찰은 물론 중앙정보부, 보안사까지 동원하며 상시 감시했다.

인하대생들은 73년 11월에 이어, 74년 11월6일 학생 1천여명이 참석한 대규모 유신반대 시위를 벌였다.



74년 11월 유신반대 및 구속학생 석방을 요구하며 시위를 벌인 인하대생들은 75년 4월 다시 시위를 벌였다. 사진은 75년 4월10일 시위장면. 사진제공 = 인하대학신문사


문의탁 총학생회장 등 74년도 총학생회장단 3명이 75년 4월 제적당하고, 5월 긴급조치 9호가 발동되면서 인하대는 학원사찰 등 노골적인 탄압과 엄혹한 감시에 억눌려 왔다.

이후 유신체제에 대한 인하대들의 공개적인 비판의 목소리와 민주화 요구는 78년 9월 들어 표출되기 시작했다.

78년 9월부터 11월까지 4차례에 걸친 유신체제 철폐 요구 유인물 살포 시위사건이 그것이다.

이 사건으로 전례없이 9명의 학생들이 차례로 구속돼고 1년6월~2년씩 징역형을 선고받았다.

78년 당시, 인하대에는 교내 서클이 다수 활동하고 있었고, 학교밖에도 통학생 등으로 이뤄진 인천 지역써클이나 교회 등을 통해 서서히 비판의 목소리들을 결집시킬 수 있는 구심체들이 지하 써클로부터 형성되고 있었다.

인하대 유인물 살포 사건도 이같은 서클간 유대와 모임을 바탕으로 오랜 억눌림 속에 터져나온 사건이다.

사건은 써클 ‘지성’ 회원들이 일으켰다. 78년 9월 첫 유인물 배포사건은 조용호(응용물리 2), 안영근(행정 2) 등에 의해 시작됐다.

이들은 ‘민주회복에 관한 인하대생의 선언문’ 이란 제하에 ‘현 정권은 재벌의 꼭두각시가 다 되어 버렸다’, ‘언론 탄압이 극에 달했다’, ‘긴급조치를 즉각 해제하고 유신 헌법을 철폐하라’는 내용을 담은 유인물을 등사해 9월28일 낮 12시20분 경 공대, 인문관 등 각 강의실과 복도, 학생회관, 기숙사 등지에 살포했다.

두번째 사건은 조용호와 곽한왕(국어 2), 김명식(국어 2)등이 주동이 돼 10월17일 실행됐다.

곽한왕은 ‘인하인에게 고함’이라는 성명서를 작성하고 김명식은 ‘양심선언’이란 제목으로 선언문을 작성했다.

이들은 김승일(법학 2)등과 이날 오전 8시경 각호 강의실 등을 돌며 유인물을 살포했다.

이들이 작성한 유인물은 ‘유신헌법 하에 시행된 대통령 선거는 무효다. 학원 자율화 보장하라’, ‘유신헌법은 일개인의 영구집권을 위한 독재정치 체제이다.

유신체제를 폐지하고 민주회복을 위해 끊임없이 투쟁하자’는 내용을 싣고 있었다.

세번째 사건은 11월3일 학생의 날을 맞아 벌어졌다.

이날은 연례행사인 교련검열이 있는 날이기도해 행사장에서 대규모 시위가 계획돼 있었다.

지역 서클과 연계돼 활동하던 김상우(기계 2), 박성룡(기계 2), 김영한(영어 2), 서병희(가정 2) 등은 이날 아침 일찍 교내 기숙사와 강의실 등에 유인물을 살포했다.

그러나 이들은 이날 현장에서 경찰에 연행됐다.

이날 주동자들의 연행으로 검열 행사장에 본격적인 반정부 시위로 발전하지는 못했지만, 공대학생 2~3백명은 교련검열을 반대하고 시위하려 시도를 하는 등 저항했다.



78년 11월3일 인하대 학도호국단 정기검열(교련검열) 장면. ‘학생의 날’을 맞아 인하대생들은 검열 행사장에서 시위를 벌이려했으나 이날 아침 주동자들이 붙잡혀 계획대로 실행되지 못했다. 사진제공 = 인하대



11월13일 조용호, 안영근, 양홍영(기계 2), 김승용(무역 3)은 3일 유신철폐와 수속된 4명의 석방을 요구하는 시위를 시도했으나 미수에 그치고 4번째 유인물을 살포했다. 이 사건으로 조용호, 곽한왕, 김명식, 안영근, 양홍영이 구속되고 학교에서 제적됐다. 송정로기자 goodsong@i-today.co.kr


시내 주택가 돌며 진실 알리려 '동분서주'

광주항쟁과 인천의 학생운동


80년 ‘서울의 봄’은 5.17 계엄확대와 광주항쟁에서 비극적인 유혈진압으로 이어졌다.

신군부는 기어코 무력으로 집권하고, 국민들이 열망하던 민주화는 나락으로 빠져들었다.

모든 언론이 통제돼 광주시민들이 폭도로 몰리는 절망적인 상황에서, 광주 항쟁의 진실을 알리려 맨손으로 나선 인천의 학생들도 있었다.

80년 ‘서울의 봄’ 민주화 시위에 참가했던 송도고등학교 동창인 이교정(인하공전), 이수하(인하대), 이완규(서울대)는 5.17계엄확대와 광주항쟁이 시작되자 5월20일경 함께 모였다.

이들은 각각 뜻을 품은 동창 등 동료들을 규합, 3개 그룹으로 나뉘어 5월22일경부터 30일까지 부평, 주안 일대에 광주항쟁의 당위성을 주장하고, 유인물을 만들어 배포하였다.

이들은 광주항쟁이 무산되자 다시 동인천역 앞에서 답동 방향으로 좌우 거리에 대규모 대자보 작업을 시도하다가 6월 중순경 현장에서 경찰에 체포됐다.

한편 이우재(서울대 4)는 5.17 비상계엄 확대 이후 같이 수배 중이던 조용호(인하대 3)와 양홍영(인하대 3)과 함께 자취방에 모였다.

80년 5월 하순 이들은 이우재가 작성한 ‘4천만 애국 동포에게 고함’ 제하의 광주항쟁 등에 관한 유인물을 인천 전역의 시내와 주택가에 살포했다.

이같은 방식의 유인물 살포는 8월10일 이들이 경찰에 붙잡힐 때까지 ‘기러기’, ‘사우회’ 등 지역 써클을 비롯해 인하대 학생 등 50여명이 참여해 지속적으로 이뤄졌다. 밤늦게 가가호호 배포하거나 버스통풍구에 올려놔 살포되는 방식도 이용했다.

7월14일에는 이호웅으로부터 받은 천주교 광주대교구 사제단 명의의 광주항쟁 유인물 ‘폭도는 누구인가’ 를 제물포역 앞 주택가에 배포했다.

8월3일에는 “민주시민과 학생을 내란혐의와 공산당으로 몰아세운다”등의 내용으로 된 ‘민중의 소리’를 중구 인현동 인현빌딩 옥상에서 살포하는 등 인천 전역을 돌며 살포했다.

사건 후 8월10일 양홍영이 의정부에서 경찰에 붙잡히고 그 후 이우재, 조용호, 곽한왕, 이정남, 권병기 등이 이 사건으로 구속됐다.

김영삼정부 들어 이들은 ‘5.18 민주화운동 관련자 보상등에 관한 법률’에 따라 뒤늦게 광주항쟁 유공자로 인정됐다.송정로기자 goodsong@i-today.co.kr


'자유'와 '민주'에 대한 갈망

인터뷰 - 조용호씨(48, 당시 인하대 2학년)


“77, 78년에 선배들도 일부 복학했고, 인천지역과 인하대 내 서클들도 생기기 시작해 학내 운동에 새로운 흐름이 형성되고 분위기도 고양됐습니다.”


78년 9월 유신철폐 시위와 80년 8월 광주항쟁 유인물 배포로 두차례 구속돼 징역형을 선고받은 당시 인하대 2학년 조용호씨(48). 그는 78년 인하대학신문사 기자를 그만두고 이념 써클 ‘지성’ 회원으로서 가입해 활동하다, 9월 유신철폐를 요구하는 첫 유인물 시위를 주도했다.

“74년 이후 긴급조치 시대, 대학의 시위라는 것이 변변치 못했습니다. 미수에 그치기 일쑤였고 유인물을 돌리는 정도의 모의수준이었으니까요. 유인물을 받아 쥔 학생들도 주머니에 쑤셔넣고 혼자 몰래 보던 공포적 공안분위기가 대학을 지배했습니다”

70년대 학생운동은 그 어떤 논리보다 ‘자유’와 ‘민주’에 대한 갈망으로 써클을 중심으로 많은 사람들에게 독재정권의 실상을 알리고 몰아낼 수 있을까에 골몰했다.

80년대 중반 이후 총학생회 중심의 대중적인 투쟁과도 다르며 이념, 노선다툼에 쏠릴 만한 여지도 없었다.

“자취방에 모여앉아 ‘우리생전에 박정희시대 끝날수나 있을까’, ‘한번이라도 사회변혁을 이뤄볼 수 있을까’ 자문하는 날도 많았습니다”

“이 사건때 구속된 한 친구의 아버님이 인천교도소 과장으로 있어, 입감때 점심도시락을 직접 배달하기도 했습니다. 또 다른 한명의 아버님은 인천시청에 근무했는데, 두 분 다 일찍 옷을 벗으셨습니다.”

유신시대 운동권은 이제 잊혀져 가는 사람들이다. 더구나 여론의 관심을 모아온 서울도 아닌, 지방의 운동권은 다 잊혀진 것이었다고 그는 생각했다.

그는 그래서 새삼 70년대 인하대 운동권을 인터뷰하려는 기자를 의아해했다.

그는 그러나 유신말기 모두 움추려 지내던 시기, 9명이 구속된 78년 인하대 유인물 시위사건은 전국적으로도 큰 사건으로 남을 만하다고 말한다.

“과거 운동가들에게 다양한 이념을 가지고 있었지만, 반독재라는 시대적 요구에 모두 집중해서 민주주의를 이루어 냈습니다. 우리세대는 민주주의에 대한 각자 자기 몫을 다 했다는 자부심과 긍지를 가지고 있습니다.”

“우리사회가 어렵고 긴 과정을 통해 얻은 성과에 비해 그 과정을 기억할 만한 기념관은 없습니다. 유신시대와 80년대에 개개인에게 닥친 폭압으로 좌절한, 잊혀진 분들 또한 기억될 수 있는 계기가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는 형을 마치고 84년 인천지역사회운동연합(인사련) 회원으로 92년 해산할 때까지 운동하다 지금은 개인 사업을 하고 있다.송정로기자 goodsong@i-today.co.kr


70년대 인하대 유신철폐 시위관련 일지

- 73.11.24 가두시위, 4명 구속(학교당국 26일까지 임시휴강)
- 74.1.8 긴급조치 1,2호 발동
- 74.11.6 1천여명 교내시위 농성(유신반대 및 구속학생 석방 요구)
- 75.4.10 교내시위(4월12일 74년도 총학생회장단 제적)
- 75.5.13 긴급조치 9호 발동
- 78.9.28 1차 유신헌법철폐 유인물 살포
- 78.10.17 2차 유신헌법철폐 유인물 살포
- 78.11.3 3차 유신헌법철폐 유인물 살포 및 시위(4명 구속)
- 78.11.14 4차 유신헌법철폐 및 구속학생 석방요구 유인물 살포(5명 구속)
- 79.10.26 박대통령 서거
- 79.11.15 복학생협의회 준비위 구성
- 80.2.6 학원사태 관련 제적, 정학생 복교(75년 제적 4명, 78년 제적 9명, 정학 4명 전원)

송정로기자  goodsong@i-toda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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