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에 진정성을 담아야 한다는 철학에서 출발했다.

교사라는 자리에 서서 교단일기를 쓰듯 곁에 있는 아이들을 그려나간다. 소박하고 담담하게 학교의 일상을 체험한 그대로 기록하고 증언하듯 그림을 그렸다.

그 다음은 교사 이야기로 넘어간다. 비정규직 김선생님을 그리고, 36년 평교사 홍선생님 초상을 담았다.

캔버스 대신 폐기된 책상 상판을, 혹은 버려진 칠판을 선택했다. 아이들이 공부하고 시험보고 도시락을 먹던 책상이다.

교사들이 날리는 분필가루 속에서 열정을 쏟아부은 칠판이다.

사 화가 정평한의 작품세계다. 그에게 그림은 곧 생활이자 삶이다.

교사와 작가라는 두 지점을 하나의 지평에 올려놓고 일치시키며, 같은 길을 만들어가고 있는 것이다.

“정평한은 일그러진 우리 시대 아이들의 초상을 낡은 책상위에 깜지를 쓰듯 붓과 칼로 꼼꼼히 아로새기고 있다.

그런데도 그 책상위의 아이들은 어둠과 상처보다 꿈과 희망으로 가득하다.

그것은 우리 곁에, 아이들과 함께 있는, 아이들 편에서 교실과 학교와 세상을 바라보는 생각하는 교사가 있기 때문에, 아이들의 벗이 되고 아이들을 사랑하는 화가가 있다는 사실 때문에 갖게되는 하나의 위안이다.”

스승으로 선배로 연을 맺은 이종구 화가가 그에 대한 애정을 푼다.

“대학시절 목표는 미술학과생이 그렇듯이 작가의 길이었죠. 교사를 염두에 둔 적은 없습니다.

졸업전 모교인 동산고로 교생실습을 나가면서 생각이 바뀌었습니다.

고교시절 그림을 지도해주고 당신의 모교진학을 권했던 이종구 선생님이 이번에도 영향을 주었어요. 삶의 모델로 다가왔습니다.” 그렇게 미술교사가 됐다.

부임 당시 교단 분위기는 한창 전교조가 깨져나가고 있는 상황이었다.

이는 그에게 민중미술과 교육이 하나라는 사고를 확장시키는 쪽으로 작용한다.

“첫 부임지에서 좋은 선배들을 많이 만났습니다. 학교당국에서는 누구와 어울려다니는지 감시의 눈길이 시퍼런 시절이었어요. 선배들을 따라 전교조 사무실에도 가고, 술도 마시면서 정신적인 연대감을 쌓았습니다. 자연스럽게 민중미술과 교육의 일치감을 가슴으로 느꼈습니다.”

미술을 통해 문화운동을 하자는 취지로 결성된 인천미술인협의회(인천민중미술인협회 전신) 창립멤버로 뜻을 같이 한다.

인미협으로 넘어가면서 지역문화운동에 자연스럽게 섞인다. 전교조 활동도 열심히 따라다녔다.



“이즈음 좀 더 나다운 작업을 찾아야 한다는 내 안의 소리를 듣습니다. 그동안 사실주의에 충실하기는 했으나 내용이 차있지 않았다는 자각에서였습니다. 진정성을 담보하는 그림을 그려야 한다. 기교에 의한 그림보다는 보는 사람이 쉽게 느끼는 그림을 해야한다는 결론을 냈습니다.”

생활속에서 느낌을 대상으로 택했다. 그의 자리는 교사였으므로 교단일기를 쓰듯 화폭에 담기 시작했다. 교사의 생활과 작가로서의 자세를 내용적으로 일치시킨 교사 화가가 된 것이다.

▲책상 상판을 화폭삼아

책상 상판에 주목한 것은 우연이었다.

변방에 있는 중학교 재임시절 장작 난로 땔감용으로 버려진 책상 판자를 가져다 긁적긁적 그림을 그렸는데 의외로 재미를 느꼈다.

아이들의 표정과 일상을 계속 담아나갔다. 캔버스를 던져버리고 상판작업에 몰두한다.

때론 둥근 나무의자를 가져다 붓칠을 하기도 했다. 3년을 그렸다.

그렇게 완성한 작품을 들고 97년 가을 첫번째 개인전 ‘들꽃-아이들전’을 연다.

화단은 일제히 그를 주목했다.

재료의 생소함도 그러려니와 무엇보다 교사로서의 자세와 작가로서의 예민한 감수성, 리얼리스트로서의 작가정신을 두루 갖추었다는 점에서다.

당시 이종구 화가는 “교직을 갖고 있는 많은 작가들 중 유독 그가 차별돼 보이는 이유는 드물게 교육의 문제를 다루고 있는데다 특히 설득력있는 조형적 완성도로 형상화한 경우가 흔치 않기 때문”이라고 젊은 교사 화가에게 찬사를 보냈다.

“곧바로 두번째 전시 주제를 잡았습니다. 경기도 양평 두밀리에서 일고 있는 폐교반대 운동에 시선이 꽂혔어요. 폐교를 그리겠다 선언했습니다.”

방학마다 전국 폐교기행을 나갔다.

텅빈 교실과 빈책상, 운동장 사진을 찍고 이미지를 채집하는 데 몰두했다. 2년만에 두번째 개인전 ‘99 폐교기행’을 열었다.

“많이 부끄러웠습니다. 그동안 열심히 다녔다고 스스로 위안했지만 폐교 현장에서 아이들과 부대끼며 느낌을 잡아내지 못했다는 자책감이 컸습니다. 고작 방학에 아이들이 없는 공간에서 흔적을 쫓아 사진 채집꾼처럼 다닌 현실이었거든요. 폐교에 대해 내가 절실히 느낀 것이 무엇이 있나. 차라리 시골 분교 선생이었으면, 그래서 그림에 푹푹 냄새가 묻어났으면 좋으련만….”

알맹이는 없고 껍질만 내보이는 전시라는 후회감이 밀려왔다고 당시를 소회한다.

▲다음은 칠판을 오브제로

세번째 개인전 주제는 교사다. 지난해 10월 ‘김선생님의 초상’이라는 부제로 인천 신세계갤러리에서 6년만에 개인전 자리를 폈다. 이번에는 책상 상판 대신 칠판을 오브제로 택했다.

“학교일상에서 아이들과 더불어 함께 지내는 동료 교사들입니다.
현장에서 일어나는 그들의 소소한 이야기를 그리기 시작했습니다. 교사들이 쓰다버린 칠판이야말로 훌륭한 재료죠. 학교마다 리모델링을 하면서 버려지는 칠판이 많거든요.”

원고지 칸이 쳐진, 혹은 모조지로 그려진 칠판 위에 복직된 하선생을, 교원평가 저지 투쟁에 나선 교사들을 그렸다.

“칠판 위 분필자국은 선생님의 모습과 닮았습니다. 저는 그 위에 작은 손재주를 부린 거지요. 그러나 붓질 하나하나는 기나긴 노동의 흔적입니다. 큰 붓으로 성큼성큼 그리지 못했습니다. 그 선생님들의 이력만큼을 그림으로 재현하려면 아무래도 작은 붓으로 채울 수밖에 없는 것이지요.”

당분간 교사를 그리는 작업을 계속 하겠다고 말한다.

▲교사와 화가

“교사와 화가 두 가지를 모두 잘하면 훌륭하겠지만 아니다 싶습니다. 초년시절 아이들을 대하던 열기 대신 게으름이 늘어났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 홍역을 앓고 나면 다시 일어날 수 있을까 자문해 보죠. 껍데기만 교사인 것은 아닌가 돌아보고 있습니다. 그림그리는 것은 또 이렇습니다. 교사로 할일이 많다보니 틈틈이 하는 작업양이 적을 수밖에 없는 것이다. 스스로의 나태함에 대해 관대해진 겁니다.”

설명은 그러한데 끊임없이 일을 찾아내는 그다.

지난해말 전시회를 마치자마자 소설가 이병주 전집 출간에 맞춰 표지그림작업을 요청 받아 6개월을 매달려 왔다.

한편으로는 전교조에서 발행하는 교사신문 ‘교육희망’에 매주 만평을 그리고 있다.

만평과의 인연은 훨씬 이전으로 올라간다. 99년부터 3년동안 전교조 인천지부 교사신문에 월간만평을 그린 경력이 있다.

당시엔 그림을 그리는 작가로서 곁길로 간다는 생각을 떨쳐버릴 수 없어 접었던 그다.

“지난해 본부에서 요청이 왔어요. 요즘 교육문제가 산적해 있잖습니까. 다시 도전을 한거죠.”

가장 시급한 문제로 성과급 지급을 꼽는다. 비정규직 교사가 30%를 상회하는 현실을 안타까워한다.

송도와 영종지역 교육개방과 관련, 검증안된 교육기관이 속속 진출하는 것을 우려한다. 널뛰는 입시제도도 걱정이다. 해결해야 할 문제가 한없다.

이를 그림이야기로 푼다.

“책상 상판 작업은 이제 접어야 할 것 같습니다. 옛 물건들이 구하기 힘들어진데다 최근의 상판은 질감이 반들반들해서 느낌이 다릅니다. 칠판작업은 더 할 생각이에요. 직접 칠판을 쓰는 대신 캔버스로 치환하려고 해요. 중요한 것은 어디에 그리느냐 보다 무엇을 그리느냐 입니다. 문제점을 냉철히 짚지는 못할 지언정 우리 시대 교육의 문제를 기록자로서 그림으로 남기고 싶습니다.”

이 시대 진정한 교사 화가는 소임을 그렇게 전한다.
김경수기자 ks@i-today.co.kr
사진=김성중기자 jung@i-toda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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