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충의의 외양간 작업 공간에는 이 땅의 시각적 역사풀이와 소외된 삶의 질박했던 옛 정경들이 직설적인 기법으로 다시 태어나고 있다.

황소와 큰 항아리의 변주와 황토흙과 농기구들의 옛스러운 정겨움이 있는가 하면, 농촌을 떠나는 아낙들의 슬픔이 북어와 꽈리, 옥수수에도 염소와 강아지에도 묻어난다.

산업화에 밀려나는 각박한 시대적 질곡이 배어 있다.” 김경인 인하대 교수가 지난 97년 첫 개인전에 부쳐 쓴 글이다.

화가 박충의 하면 인천변두리 월곶과 시흥마을 빈 축사를 개조한 작업실이 먼저 떠오른다.

지금은 도심으로 작업실을 옮겼으나 첫 개인전을 열기 훨씬 이전부터, 그리고 그 후에도 상당히 많은 작품을 그곳에서 만들어냈다.



축사 옆 헛간에는 틈틈히 주워다 놓은 항아리와 멍석, 문짝, 구유, 써래, 쟁기에 이르기까지 아무짝에도 쓸모없을 듯한 고물이 항상 수북했다. 재개발지역이나 철거지역을 찾아다니며 수습한 물품들이다.

그는 택지개발지역을 돌아다니며 수백년동안 살을 묻고 견뎌온 농촌이 처참하게 사라지는 현장을 목격한다.

이후 농촌을 주제로 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바로 택지개발에 밀려 해체되는 농촌인 것이다.

아직도 이 도시 곳곳에서 개발은 계속된다. 대대로 살던 땅이 일순간 갈아엎어지는 현실을 작가는 비극이라고 표현한다.

그러므로 그는 작품을 통해 땅과 고향으로 대변되는 전통의 소중함을 환기시키는 노력을 멈추지 않고 있다.

▲숫가락 조형물 시도

미술가 인생의 연원을 되짚어보면 고교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3년동안을 온통 미술반에서 그림그리며 지냈다.

입학하자마자 없던 미술반을 세운 것도 그였고 전국미술대회가 열릴 때마다 후배들을 데리고 야외스케치를 나다닌 것도 그였다.

데생과 정밀묘사를 시험치른다 해서 택한 곳이 인하대 사범대학 미술교육과다. 입학했으나 그림에 몰두할 형편이 안됐다.

주위 선배나 친구들처럼 시국을 한탄하며 술잔을 기울일 겨를도 없이 학비를 버느라 닥치는대로 일 했다. 겨우 2년을 마쳤다. 입대를 선택한다.

“복학을 하면서 의식이 많이 달라진 나를 발견했습니다. 사회는 여전히 어수선하고 곳곳에 다툼이 있는 상태였죠. 배타적인 관계를 깨버리고 하나로 모아야한다는 의협심이 내부에서 일고 있는 것을 느꼈습니다. 고민 끝에 도달한 것이 수저로 만든 조형물입니다.”

그의 생각은 이렇다. 수저는 사람을 상징화한다.

인하대 전체 학생을 대상으로 수저를 모은 후 이로 조형물을 세운다. 1만6천명의 마음을 모으는 것이다.

총학생회가 그의 구상을 받아들였다. 곳곳에 수저 모집함과 별도의 모금함이 설치된다. ‘우리들의 꿈’이라는 노래도 만들어 교내 방송으로 동참을 호소하기도 했다.

“결과는 무산으로 그쳤습니다. 두 세달 지나자 열기가 시들해진데다 일일찻집을 열었는데 오히려 적자였습니다. 모금도 미미한 수준이었구요. 언젠가는 다시 세워보겠다는 의지를 다지며 뜻을 접었습니다.”

내부에 일렁이는 기운을 의식밖으로 꺼낸, 사회를 향한 첫번째 외침은 불발로 그치고 말았다.

▲그림에 의식 넣기

다시 휴학을 했다. 2년간 전국을 떠돌아다니며 목수일부터 도배, 간판 작업, 인테리어 등 손에 닿는 대로 일을 한다. 많은 군상들을 만났다. 사회를 보는 눈도 달라졌다.

“복학을 했습니다. 그림이 그 이전과는 판이해졌어요. 목수들과 잠을 자고 살아가는 이야기를 들은 것이 나의 의식을 깨운 겁니다. 구조적인 사회의 불합리성을 온몸으로 느낀 세월이었습니다.”

이제 그림은 다분히 투쟁적이다. 전두환과 노태우가 등장하고, 데모하다 잡혀 쇠사슬을 차고 끌려가는 이, 임수경이 방북하는 그림들을 그린다.

몇 몇 뜻 맞는 작가들과 근·현대 민족사적 수난을 놓고 문제를 제기한 ‘종군위안부전’을 열기도 한다. 민중미술이라고 불리우던 당시 현실주의 미술 중심에 서 있었다.

▲해체되는 농촌을 주제로

“그림을 그리면서 줄곧 느낀 것은 테마가 확실하게 와 닿지 않는다는 불완전함이었습니다. 어느 순간 더이상 작업 진도가 안나갔습니다. 이 때 눈에 들어온 것이 도시 변두리 월곶·시흥 일대 철거지역이었어요. 개발에 밀려 파헤쳐진 농가를 그리고 그곳의 할머니를 그리기 시작했죠. 내면 깊숙히 웅크리고 있던 감성이 일렁이는 감흥을 느꼈습니다.”

그동안 바라보던 비판적 시각과 감성적인 끌림이 맞아 떨어지는 순간이었다.

빈 축사 한칸을 얻어 작업실로 고치고 본격적으로 농촌을 주제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한다. 1년동안 작업에 몰두했다.

첫번째 개인전 ‘땅에 흐르는 노래’는 그렇게 열렸다.

“슬프기도 하지만 그보다는 언짢은 기분이었습니다. 조상 대대로 살던 땅이 일순간에 엎어져요. 개발은 전방위적으로 진행됩니다. 그곳에 살던 이들은 뿔뿔이 흩어져버립니다. 사람 사이 관계가 컴퓨터 전원을 끄면 아웃되는 것처럼 단번에 날라가죠.”

▲돌판각에 눈을 돌리다

세번째 개인전은 다소 의외스럽게 돌판각화전이다. 돌을 깎아서 나무에 붙이기도 하고 혹은 상을 찍어 판화를 완성했다.

“원래 목공을 좋아했어요. 나무를 깎아서 만드는 일은 일상이었습니다. 나무 대신 돌을 택한 거죠. 해남에서 돌을 사와 먹으로 그림을 그리고 깎는 작업이 재미있었습니다.”

재료는 바뀌었지만 주제는 여전히 땅과 농촌 사람들이다. 지팡이 짚고 논길을 걸어가는 할머니가 있고, 겨울 눈 썰매를 지치는 아이들이 있고, 길게 누운 소가 있다.

동시에 낱낱의 그림들은 수많은 이미지를 품고 있다. 그 은유들은 직접적인 표현보다 더 효과적으로 공감을 불러 일으킨다.

여러 차례 돌판각 전시를 이어간다. 월미도 야외에서, 인하대 인경호수에서, 그리고 이름을 건 또 한번의 개인전을 열었다.

작업실에서 만난 작가는 다시금 돌판각 작품 만들기에 열중하고 있다. 이달 27일부터 합천 해인사에서 열리는 팔만대장경 축제에 초청됐기 때문이다.

성사되기까지 혼선이 있었다. “원래는 연합전을 열기로 했는데 판화하는 작가들이 다르다 해서 저를 밀어냈어요. 전각팀에서도 배타적이었구요. 결과적으로는 개인전으로 확대됐습니다. 형식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는 인식을 심어주고 오려고 해요.”

사실 그의 작업은 전통적 전각과는 사뭇 다르다. 방식은 전통에 기반을 두되, 이를 새롭게 해석하고 응용한다.

굳이 분류하자면 돌판각화는 회화적 전각에 속한다. 전각 그 자체에 자유로운 표현과 실험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전통, 그리고 소

그의 수집광은 농촌을 그리기 시작하면서 시작됐다. 철거직전 폐가를 돌아다니며 항아리를 줏어오고 버려진 농기구를 줏어온다. 그곳에 살던 이들이 쓰던 물건들이다.




“전통에 대한 생각을 많이 했습니다. 집과 생활용품에는 우리만의 색채가 녹아 있지요. 폐기처분직전 물건 속에도 그것을 만들고 사용한 이들의 숨결이 담겨 있습니다. 우리 것을 촌스럽다고 치부하는 관념들이 어디서부터 생겨났는 지 안타까울 뿐입니다. 우리의 가치를 드러내는 보배들인데 말이지요.”

그는 전통적인 삶을 사는 것이 꿈이자 목표라고 말한다.

“농촌에서 땅을 체험하고 먹을거리를 장만하고 몸으로 일궈서 주변에 나눠주는 삶이죠.”

한편으로는 그런 이야기를 그림으로 담으려 한다.

“소 작업을 통해 전통적인 느낌을 표현하려 해요. 소는 농촌 정서가 고스란히 배 있는 동물이지요. 전통이 소중하다는 느낌이 와 닿는, 소 그림을 그릴 겁니다.”

그의 그림에는 오래전부터 소가 등장해왔다. 90년대초 우루과이라운드 당시에는 울부짖는, 다소 저항적인 소였다.

차츰 힘없고 체념한 듯한 소로 넘어간다. 파헤쳐지는 농촌에 대한 한없이 우울한 작가의 감정이 고스란히 녹아 있다. 이제 그 소는 다시한번 변화하려 한다. 끊임없이 전통이 소중하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김경수기자 ks@i-today.co.kr·사진=김성중기자 jung@i-today.co.kr

박충의는…




▲1962년 백령도 출생
▲1982년 인하대학교 사범대학 미술교육과 입학
▲1990년 인하대 미술교육과 졸업
▲2003년 홍익대 미술대학원 회화과 졸업
▲개인전으로는 ‘땅이 흐르는 노래 1’(1997년 이십일세기 화랑, 다인아트 갤러리 초대전), ‘땅이 흐르는 노래 2’(1998년 깊은 사랑채 전통찻집), ‘돌판각화 기획초대전’(2002년 인천신세계갤러리), ‘돌판각화전’(2004년 월미도 문화의 거리, 인하대 인경호), ‘겨울논’(2006년 혜원갤러리)
▲수상경력은 1989년 신미술대전 대상(디자인포장센터), 상형전 대상(서울갤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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