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신문사는 이번주 부터 매주 금요일, 지난 70년대 부터 87년 6.10 항쟁까지 인천에서 전개된 민주화운동을 사건 중심으로 연재합니다.

인천은 일제시대 부터 6,70년대 유신시대, 80년대 신군부 정권에 이르기까지 독재와 민주세력 탄압에 맞서 노동운동을 비롯해 종교계, 학생, 시민사회의 민주화 운동이 활발이 이뤄져왔습니다.

인천민주화운동계승사업회는 이에따라 ‘인천 민주공원 및 민주회관 건립추진위원회 준비모임’을 발족하고 공원건립과 민주화운동사 발간을 목표로 역량을 모으고 있습니다.

본보는 이에 인천민주화운동계승사업회와 함께 사건으로 본 인천 민주화운동 약사를 8개 분야로 나눠 싣습니다.

“기아임금에 허덕이며 생존권을 부르짖는 노동자들에게 가해지는 천인공노할 탄압을 보라! 수년간 합법적인 노조를 온갖 악랄한 방법으로 파괴하려고 시도해온 동일방직은 노동자들에게 똥물을 퍼붓는 등 야수와 같은 만행을 저지르고 말았다...” (동아자유언론수호투쟁위원회 1978.3.17)

70년대 후반, 긴급조치 9호의 유신시대에 나체시위와 똥물투척으로 세상에 알려졌던 동일방직 사건.

그 잔인하고 끈질긴 노조 탄압과 공작에 맞선 동일방직의 노조 민주화운동은 그 치열했던 투쟁 만큼 ‘70년대 최초로 민주노조의 깃발을 올린 사건’으로 민주화운동사에 길이 남는다.



동구 만석동에 자리한 동일방직은 1934년 조업을 개시한 일본 도오요(동양)방적 인천공장을 모태로, 1955년 민영화되어 60년대 후반 값싼 여성 노동력을 바탕으로 수출 무대에서 선두를 다투기도 했다.

동일방직은 1972년 5월10일 노조 대의원대회에서 남자 후보들을 물리치고 전국 최초로 여성지부장(주길자)이 탄생하면서 민주노조 운동의 좁다란 길목에 들어선다.

당시 전체 조합원 1천383명 중 1천214명이 여성들이었지만 지부장은 남자가 독점해온 것이 관례였다.

여성지부장 당선 후 노동조합은 본격적인 탄압이 들어오기 전인 1976년 4월까지 자주적이고 민주적인 노동조합으로 변모해갔다.

노동자들이 현장에서 겪는 부당함과 불편함을 하나하나 해결해나가며 노동자들의 근무조건을 크게 개선시켜나간 것이다.

기숙사, 목욕시설, 탈의실 설치에서부터, 솜먼지를 빨아들이는 대형 집진기 설치까지 교섭을 통해 해결할 수 있었다.

실질적인 생리휴가와 식사 시간, 쉬는 시간도 확보했다. 기계를 세우면 실이 끊어진다는 이유로 비번 시간대에 알아서 식사하던 것을 조정해 제대로 된 점심시간을 확보한 것이다.

회사측은 폐결핵 2-3기된 조합원의 X-Ray 결과를 벽에 붙여놓았었다.

조합은 이를 벽에 붙이지 못하게 하고 무급으로 쉬는 폐결핵 환자들을 유급으로 쉴 수 있게 했다.

욕설, 몸수색 등 인권유린의 관행도 배격했다.

이런 활발한 활동이 가능했던 이면에는 인천 도시산업선교회(산선), 인천 가톨릭노동청년회(JOC) 등의 영향을 무시할 수 없다.

인천 산선의 조화순 목사는 66년 11월 6개월간 동일방직에 입사해 노동자들과 함께 생활했다.

노조는 자체교육 등 활발한 교육과 소모임 활동을 통해 의견을 나누고 문제점을 토론했다.

이런 교육과정에서 여성조합원들이 노동자에게 권리가 있고 똑같은 인간임을 깨닫게 된 것이 큰 힘이 됐다.

그들은 당시 상황을 “노동조합 속에서 새로운 인간다운 삷의 길을 발견했다”고 말한다.

여성 노조집행부에 대한 높은 지지는 75년 2월 후임 이영숙 지부장의 당선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회사쪽은 이에 위협을 느꼈다. 76년 4월3일, 예정된 정기대의원대회가 회사측의 개입으로 무산되며 조합원들은 기나긴 고난의 행군을 시작한다.

회사측은 대의원대회를 앞두고 가부장적인 남자조합원들을 이용하여 대의원이 되도록 적극 지원했고, 노동조합을 분열시키며 규약개정을 통해 집행부에 대한 불신임을 시도했다.

7월23일 경찰이 지부장을 연행해간 가운데 지부장 불신임안이 통과됐고, 이에 격분한 노조원들의 농성이 시작됐다.

이튿날 농성 조합원은 800여명으로 늘어났고 밤 10시부터 전면 파업에 돌입했다.

나체시위는 농성 3일째인 7월25일 벌어졌다.

경찰이 출동하자 조합원들은 두려움과 긴장속에 강제연행을 피하려 옷을 벗었다.

그러나 경찰은 무자비한 진압작전으로 50여명이 기절하거나 14명이 병원으로 실려가는 사태 끝에 대의원들과 완강히 저항하는 조합원들까지 72명을 연행했다.

노조는 77년 1월 ‘동일방직 사건 수습투쟁위’를 구성하고 사건의 진상을 알려나갔다.

그리고 4월 수습 대의원대회에서 이총각을 지부장으로 선출하는데 성공한다.

그러나 이후 정보기관들과 연계된 회사측의 공작은 섬유노조 본부까지 가세해 집요하게 전개됐다.



똥물사건은 78년 2월21일 새지부장을 선출할 대의원 선거날, 경찰과 섬유노조 본부, 회사가 지켜보는 가운데 공공연히 자행됐다.

조합원들의 비명소리와 함께 회사측 남자들이 몽둥이로 노조 사무실 기물을 파괴하고 투표함을 때부쉈다.

이어 5~6명이 방화수통에 똥을 담아와 고무장갑을 낀 손으로 여성 조합원에 달려들어 옷과 얼굴에 닥치는 대로 쳐발랐다.

경찰은 수수 방관했고, 선거는 무산됐다.

이 사건을 계기 삼아 섬유노조는 지부장 등 간부들을 제명하고 행동대를 가동, 노조기능을 마비시켰다.

그후 노동자들의 단식과 과감한 시위 등 끈질긴 투쟁에도 불구하고 회사측은 4월1일 조합원 124명을 해고한다.

동일방직 민주노조 운동은 그후 기나긴 복직투쟁으로 전환한다. 박정희 대통령의 죽음 후, 동일방직 노조는 회사와 복직에 합의점을 찾았다.

그러나 복직을 눈앞에 두고 5월17일 비상계엄령이 내려지자 2년여에 걸친 힘겨운 복직투쟁도 무위로 돌아가고 말았다.

"민주노조 포기할 수 없었다"

이총각 동일방직 노동조합 전지부장

11일 오전, 남동구 간석3동사무소 담장을 끼고 가파르고 좁다란 길을 한참 올라 ‘청솔의 집’ 관장, 동일방직 이총각 전지부장(58)을 찾았다.

78년 4월, 해고와 구속을 당한 후 그는 블랙리스트에 올라 주안동과 남동공단의 봉제공장 등을 전전하다 91년 구월동 모래네 마을에 전세비를 털어 주민과 노동자를 위한 ‘청솔의 집’을 세웠다.

그리고 2001년 부터 간석3동 남동구자활후견기관 관장으로 삶에 지친 주민들의 생활을 변화시켜가는 새로운 ‘운동’을 개척해 가고 있었다.

“선망의 대상이었던 동일방직에 66년 18세 나이로 정작 입사해보니 생지옥 같았죠. 솜먼지로 50미터 앞도 잘 안보였고, 집체 만한 기계 소음 때문에 호루라기로 사람을 불러 의사소통을 해야했습니다. 기계는 24시간 돌아가 밥먹는 시간이나 화장실 갈 시간도 없었습니다. 완전히 기계중심의 근무여건이었습니다. 온도 유지를 위해 공장안은 항상 더워 4계절 하복을 입었는데 탈의실도, 목욕실도 없었습니다”

지부장 시절, 그는 정부나 회사의 탄압보다 ‘동료와의 관계’에 더 심한 고통을 느꼈다고 했다.

그는 노무과에 따로 불려가 정보부 직원과 정보과 형사가 함께 한 자리에서 협박과 공갈에 시달렸다.

“‘대세야, 거부하면 너희가 예상치 못한 일이 생길수도 있다’며 노골적으로 공갈을 쳤습니다. 노조 집행부를 (남자들한테)넘겨주라는 거죠. 그러나 제일 힘들었던 것은 죽어도 같이 죽자던 동료들이 회사와 정부의 탄압과 압력에 소리소문 없이 떨어져 나갈 때였습니다. 버팀목이 무너지는 듯한 허탈함에 빠져들기도 했죠.”

그러나 그는 민주노조를 포기할 수 없었다고 단호히 말한다.

무엇보다 70년대 당시 선도적이었던 민주노조의 역할을 포기할 경우, 막 피어오르던 다른 사업장의 노조 민주화에 실망과 좌절을 심어줄 수도 있다는 책임감 때문이었다.

그는 지금 하고있는 자활사업에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하고 있다.

“처음엔 정부의 지원받아 하는 일이라 거부했으나, 주변의 권유로 운동성을 살려 해보기로 했습니다.

주민들과 매일 만날 수 있는 것이 좋았습니다.

그들과의 접촉을 넓히고 관계성 좁혀나가는 과정에 그들의 삶을 변화시킬 수 있었습니다.

알콜중독자 였던 사람이 변해 지금 정말 열심히 일합니다.

무덤까지 가져가겠다던 그들만의 비밀을 털어놓기도 합니다.

청소, 냄새나는 노인들의 옷 빨래도 지금은 단순 봉사나 먹고 살기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이같은 일 속에 인간과의 관계를 새로이 깨닫고 삶의 의미를 다시 찾고있는 겁니다”

78년 중정 노사담당관 최종선 진술

동일방직 노조탄압 과정과 124명이 해고되기까지 중앙정보부, 경찰, 노동청이 개입되어 있었다는 것은 당시 정황으로 분명해 보였으나, 공식적으로는 ‘노-노 싸움’으로 취급됐다.

민주화운동관련자 명예회복 심사가 진행될 때도 동일방직 해고자들은 민주화운동 관련자로 인정받지 못했다. 정권의 탄압 근거가 약하다는 것이었다.

그 상황에서 중앙정보부에서 의문사한 서울대 최종길 교수의 동생 최종선이 2001년 3월19일 동일방직에 대해 진술했다. ‘산자여 말하라:나의 형 최종길교수는 이렇게 죽었다'를 출간하고 1주일 지난 후였다.

최종선은 똥물사건이 있기 직전인 78년초 중앙정보부 경기지부에 노사담당관으로 부임하여 동일방직을 담당한 후 81년 사직했다.

‘민주화운동관련자명예회복및 보상심의위원회’에 제출한 A4용지 4쪽 분량의 진술서에는 똥물사건 당시 중앙정보부와 섬유노조의 개입 사실과 조합원 124명을 해고시키게 된 과정을 적고있다.

위원회는 이를 근거로 2001년 7월~9월에 거쳐 이들 해고자 가운데 49명을 민주화운동 관련자로 인정했다.

최종선은 진술에서 똥물사건 발생 2주 전쯤, 보안사 인천지부로부터 신포동 뒷골목 배명여관에 거동수상자들이 집단으로 기거하며 들락날락한다는 전화를 받았다며 다음과 같이 밝힌다.

“현장에 도착해 신분을 밝히고 이들에게도 신분을 밝히라고 했으나 대꾸를 않했다. ‘밝히지 않을 경우 강제구금하겠다’는 식으로 엄포를 놓자 이 두 사람은 그때서야 ‘정말 우리가 누군지 몰라서 묻느냐. 위(중정 2국)에서 다 알고 있다’며 자신들을 ‘전국섬유노조 조직국장 '과 ‘조직행동대장'이라고 밝혔다. ‘뭣하러 왔냐’는 질문에 ‘동일방직 노조 깨부수러 왔다’고 말했다”

최종선은 강력한 개입중지 의견을 담은 보고서를 쓰고 그 과정에서 본부 2국 경제과 담당관과도 통화도 했다며 “본부와 지부 사이에 의견조정이 되지 않자 결국 본부로부터 ‘경기지부는 이 일에 빠지라’는 연락이 왔고 ‘그럼 빠지겠다’는 보고서까지 썼다”고 진술했다.

그러나 똥물사건으로 문제가 커지자 본부 2국은 뒤로 빠지고 경기지부와 경기도경의 일이 되고 만다.

그는 결국 다음과 같이 조치한다. “나는 농성자들에게 복직 보장과 구속자 석방을 약속하도록 관계기관을 통하여 통보하도록 했다.

그러나 이들은 돌아오지 않았다... 내 생각엔 그때 노조원들을 회사로 돌려보내는 것만이 사태가 복잡해지는 것을 막는 길이었다고 생각한다.

단 한 명도 시일내 복귀하지 않았으므로 본부에 보고하여 농성자들을 전원 해고시키도록 조치했고, 노조는 다시 집회를 열어 새집행부를 구성토록 했다. 블랙리스트는 본부에서 작성하고 관리 집행했던 것으로 알고 있다.”

이에 대해 이총각은 “몇명이 복귀를 위해 들어갔으나 회사측이 사전합의 사항을 이행하지 않고 부당한 각서를 쓰게해 복귀할 수 없었다”고 말한다. 송정로기자 goodsong@i-today.co.kr

저작권자 © 인천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