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나라당 안상수 후보
'워크홀릭' 성공한 CEO 출신 정치실험 좌절 딛고 시장 재선

한나라당 안상수 인천시장 후보는 지난 2006년 지방선거 당시 ‘워크홀릭(일 중독자·workholic)’이란 별명을 안고 민선시장 재선에 도전해 성공했다.

그를 8년간 지켜본 상당수 공무원들은 지금도 “안 시장은 일 중독자 같다. 방대한 인천시정을 조목조목 챙기는 것을 보면 놀랍다는 생각에 앞서 과연 사람이 그 정도까지 몰입할 수 있을까하는 생각이 든다”고 말한다.

‘왜 그렇게 일만 하느냐. 좀 쉬면서 여유있게 해도 되지 않느냐’는 질문에 그는 “일은 때가 있는 것이고, 때를 놓치면 의미도 놓치게 되는 것”이라는 말로 질문을 채곤 한다.

안 후보가 평범한 바닷가 소년에서 국내 3대 도시인 인천시장 3선 등정길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은 그가 화려한 정치인 출신이어서, 혹은 성공한 CEO출신이어서가 아니라는 것이 그의 이력 곳곳에서 묻어난다.

가난한 어부의 아들로 태어나 고학으로 서울대학원을 거쳐 유학을 떠나 국내 처음으로 1970년대 ‘국제금융 선물중개사’ 자격증을 땄다.

지금도 기업계에선 신화로 알려진 제세산업의 기획관리실장을 거쳐 동양그룹 종합조정실 사장까지 올랐다.

그가 정계에 첫발을 딛여 놓은 것은 지천명의 나이였던 1996년, 15대 총선 당시 신한국당이 CEO영입 케이스로 그를 발탁하면서부터다.

성장기를 거쳐 젊은 CEO로 성공하기까지가 그랬던 것처럼 그의 정치실험도 초반부터 좌절의 연속이었다.

인천 계양·강화갑에서 출마했다 낙선한 그는 정치입문 2년생이었던 1998년 겁도없이 시장선거에 도전해 두번째 고배를 마신다.

1997년 정권교체후 처음 치러진 지방선거였던 만큼 당내에 시장 후보 지원자가 없었던 까닭에 그의 출마선언은 패배를 알면서도 결행에 옮겨진 일대 사건이었기 때문이다.

대기업을 경영했던 경험을 살려 인천시 행정을 끌어보겠다는 당찬 용기가 오늘의 안 후보를 만들었던 계기가 됐던 것이다.

당시 시당위원장으로 선거를 진두지휘했던 조진형 의원은 “당시에는 정권교체 여파로 어느 누구도 시장선거에 출마하지 않으려고 해 후보를 찾느라 정말 고생했다”며 “그때 안 후보가 시장선거에 나가겠다고 해 당에서는 얼마나 다행스러워했는지 모른다”고 당시를 회고했다.

정치 2년생 안 후보의 도전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검찰총장 옷로비 사건으로 정국이 들끊던 1999년 그는 또다시 도전길에 오른다.

15대 총선에서 안 후보에 패배를 안겨줬던 여당 국회의원이 선거법 위반으로 중도하차하면서 재선거가 실시된 것이다.

당시 그는 수도권에서 펼쳐진 2곳의 재보선에서 야당총재였던 이회창 총재(송파갑)와 동반 출격하는 행운까지 안게 됐다. 이번엔 성공이었다.

이때부터 당시 여당의 386세대 운동권 영입케이스로 정계에 입문한 민주당 송영길 인천시장 후보와의 질긴 인연이 시작된다.

그러나 국회입성의 기쁨도 잠시 10개월 만에 치러진 2000년 16대 총선에서 민주당 송 후보와의 리턴매치에서 패배해 또다시 야인의 시련을 겪는다.

정계입문 4년 만에 4번의 선거를 치른 것도 국내 정치사에서 전무후무한 기록이지만 4번의 선거가 모두 전국적인 주목을 받았던 것도 안 후보에겐 특별한 기회였던 것이다.

그후 2002년, 2006년 두 번의 인천시장 선거에서 연거푸 당선되면서 그는 민선시장 3선의 등정길에 오르게 됐다.

3번의 국회의원 선거와 3번의 시장선거를 치르면서 그는 사실 그의 모든 것이 세상에 발가벗겨졌다.

고향 태안 앞바다에서 해일로 집안이 풍비박산이 난 일부터 불치의 병을 앓고 있는 아내 정경인(56·전 한성대 교수)여사와의 애틋한 사랑이야기, 고학시절 아르바이트 논란, 병역면제 소동, 형제들 이야기, 안 후보가 출마했던 선거마다 단골 메뉴다시피 화두가 됐던 이들 소재들은 선거를 거치면서 하나 둘씩 의혹을 풀어 ‘그때 선거 때는 그랬다’가 돼버렸다.

안 후보는 이번 선거에 앞서 ‘2014년 인천아시아경기대회 차질없는 준비’와 ‘인천경제자유구역 2단계 사업’,‘인천 구도심 활성화’ 등을 역점사업으로 제시하며 ‘미래와 세계로 가는 관문도시 인천 발전론’을 내놓았다.

비록 이들 역점사업을 추진해 오는 과정에서 오류도 적지 않았다는 지적도 만만치 않으나 이들 역점사업이 완료되는 2014년쯤이면 인천이 명실상부한 국내 2대 도시, 동북아 국제도시로 거듭날 수 있다는 구상인 것이다.

“잘한 것은 잘했다고 인정해주는 선거문화가 아쉽다”는 그의 말대로 워크홀릭했던 지난 8년간의 성과를 토대로 인천지역에서 첫 3선시장이 될 수 있을지 시민들의 행배에 안 후보의 발걸음은 더욱 바빠지고 있다. 박주성기자 jspark@i-today.co.kr

민주당 송영길 후보
'수불석권' 386 대표주자 꼽혀 국회의원 3선 거물급 정치인

‘수불석권(手不釋卷)’ 386대표주자의 하나였던 임종석 전 의원이 송영길 인천시장 후보를 생각하면 떠오르는 말이라고 소개한다.

결코 손에서 책을 놓지 않는다고 했다.

영어, 중국어, 일본어를 배우기 위해 방송통신대에서 공부하는 송 후보의 열정에 대해서도 그는 높이 추켜 세웠다.

뒤늦게 인천시장 후보로 확정된 그에겐 ‘인천을 모른다’란 꼬리표가 붙기도 한다.

하지만, 8년간 시정을 이끌어던 안상수 후보에 비해 “논리에서 만큼은 결코 뒤질 게 없을 것”이라는 게 그의 보좌진의 말이다. 학습 능력이 상당히 탁월하다는 것이다.

송영길은 전남 고흥 소록도 앞바다에서 6남매 중 넷째 아들로 태어났다.

가난했지만 공직자였던 부친의 대쪽같은 가르침은 4형제 모두 고시합격을 내자 ‘천재 집안’이란 극찬까지 받는다.

“나의 벗 송영길은 시골 일꾼같은 건장한 체구에 평소에는 말이 없고 그림을 잘 그리는 모범생이었다” 고교동창 김효석씨(‘오월의 빛’ 회장)의 말이다.

전남 광주 대동고 2학년생이었던 송영길은 당시 학원자율화 시위를 주도한 학생회 간부 중 한명이었다고 한다.

1년 뒤 겪은 5·18에 대해 송 후보는 “저의 인생을 근본적으로 바꾸어 놨다”고 했다.

1981년 연세대 경영학과에 입학한 후에 “연세춘추 기자생활을 하다가, 역사는 해석하고 비평하는 자에 의해서가 아니라 실천하는 자에 의해서 움직인다는 생각에 학생운동에 참여하게 됐다”고 한다.

이후 그는 초대 총학생회장(1984)으로 민주화운동에 참여하다 구속당하기도 했다.

석방 이후 송영길이 찾았던 곳이 바로 인천 부평. 1985년 약관을 갓 넘긴 송영길은 배관용접공, 목공으로 노동자 생활을 했다.

1987년엔 박종열 목사와 함께 인천기독교민중교육연구소를 설립해 노동상담도 진행하는 한편 1991년엔 전국택시노동조합연맹 인천시지부 사무국장을 맡기도 했다.

그 즈음 사회주의 붕괴를 목도한 송영길은 새로운 길을 모색했다. 2년 동안 골방에서 사법시험을 준비한 끝에 합격해 이른바 제도권 진출의 교두보를 마련한 것이다. 법원과 검찰청에서 시보생활을 한 그는 1997년 ‘황해합동법률사무소’를 차려 변호사 활동을 시작했다.

근로자와 서민들을 위한 인권 변론이나 무료 법률 상담활동이 그의 몫이었다.

국민의 정부 출범 이후에는 새정치국민회의의 젊은 피 수혈론에 부응해 인천시지부 정책실장을 맡았다.

1999년엔 이기문 전 의원이 의원직을 상실해 보궐선거가 치러지자 새정치국민회의는 송영길을 공천했다. 그때 맞붙은 이가 안상수 후보다.

“공천결정이 너무 늦어졌고, 이 때문에 준비과정도 부족했다. 또 옷로비 사건 등 악재가 이어져 패배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를 이렇게 회상한 송 후보는 ‘한번의 실패에 좌절하지 않는다’고 마음을 다졌다.

새로운 세기가 시작된 2000년 4월 봄. 그는 보궐선거에서 패배를 맛본 안상수 후보와 또 다시 붙어 4천여표 차이로 당선되는 영광을 누렸다. 그의 나이 37살 때였다.

2004년 탄핵정국 속에서 17대 열린우리당 후보로 국회에 입성하는 데 성공했으나 탄탄대로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보궐선거 출마 당시 대우 김우중 회장으로부터 받았던 후원금 문제가 불거져 그는 법정에 서야 했고, 이로 인해 시민사회계로부터 낙천후보 대상자로 꼽히기까지 했다.

법조계의 한 인사는 “당시 송 후보는 시민사회계에 대단히 큰 상처를 받은 것으로 알고 있다”며 “이후 한미 FTA문제를 비롯해 경인운하 등 각종 현안에 대해 의견차를 좁히지 못했던 점도 이같은 이유가 일부는 작용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16대와 17대에 법사위와 재경위 위원으로 활동한 그는 지난 2008년 18대 국회의원 선거에서도 당선돼 386 출신 정치인 가운데 유일하게 3선의원에 등극하면서 당권이나 대권까지 넘볼 수 있을 정도의 전국적인 정치인으로 성장했다.

하지만 당내 상황은 그에게 ‘효자’가 돼 줄 것을 요구했다. 이번 지방선거에서 수도권 전패를 할 경우 당내 존립기반까지 흔들릴 수 있었다는 것이다.

“출마를 놓고 실제로 많은 고민을 했다. 민주당을 바꿔야 한다는 절박한 생각도 있었지만 6·2선거에서 모두 패할 경우 3선의원이나 당권 등은 아무 의미가 없을 것 같았다.”

절박한 상황에서 출마하지만 인천이 자신을 큰 정치인으로 키워준 만큼 이젠 인천을 위해 갚아나가겠다는 각오다.김창문기자 asyou218@i-toda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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