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번째 미션, 지역 기반으로 활동하는 젊은 건축가 찾기. 만 50세 이하의 연령대로서 자기 세계의 구현을 위하여 끊임없이 노력하는 건축가. 인천의 건축디자인 기반이 악조건임에도 불구하고 오늘도 ‘작지만 강한’ 건축의 소망을 인천에 새기고자 부단히 노력하고 있는 인물을 찾아 나선다.

희망을 짓는 건축가의 꿈이 매양 같을 순 없지만 치열하게 살아가는 그들의 존재감을 확인하는 데는 다름이 없다. 이번호에 만나는 건축가는 인천의 반(反)건축적 정서에 저항하는 특별한 의식의 소유자다.

이재식(50·두인종합건축 대표). 두 시간 가까이 그는 수없이 많은 말을 쏟아냈다. 취재노트는 이미 20쪽을 훌쩍 넘어 30쪽을 바라보고 있다. 그러고도 그의 말 보따리는 멈춰 설 줄 몰랐다.

오랜만에 말 상대가 생겨서 너무 좋았다는 이 대표는 자타가 인정하는 인천건축의 안티 아이콘이다.

그가 보여준 저간의 행보는 기존의 인천 건축사회로부터 경계 1호 인물로 그를 정위시켰다. 왜 그런 평가를 받고 있을까?

“건축사들이 당장의 이익에만 연연하여 대의를 보지 못하고, 현실에 안주하는 것이 못마땅했어요. 인천에서 건축사가 요즘처럼 대우받지 못했던 때가 있었을까 싶지요. 전문가로서 사회적인 지위를 확보하기 위해선 권리주장에 앞서 책임을 다하는 소명의식이 전제되어야 한다고 보는 겁니다.”

그는 2008년, 2009년 연속으로 지역건축사회 회장 선거에 나섰다가 거푸 고배를 마셨다.

학연이 팽배한 지역구도 안에서 타 지역 출신으로, 대학에 기반한 그의 연고는 상대적으로 취약점을 노출시키기도 했지만 그보다 그의 패인은 돈키호테와 같은 저돌형 자의식에 근거했다고 보는 것이 옳을 듯싶다. 비굴한 타협을 용납하지 않는 그의 천성에서 이유를 찾는 것이 빠를 것이다.

“건축문화제만 해도 그래요. 99년 ‘건축문화의 해’에 맞춰, 처음 시작한 ‘인천건축도시주간’이 모태가 된 행사지요. 그 때만해도 행사의 근간은 ‘시민과 함께 하는 건축전’이라는 목표가 분명했습니다. 관은 뒤에서 지원하고, 건축사와 대학교수들이 함께 주도하는 기틀을 만들었지요. 근데 회를 거듭해오면서 시의 지원금도 억대로 늘어나면서 주객이 전도된 인상이 커요. 시 공무원들이 상전이 된 양하고, 건축사회는 시의 하급 기관과 같은 비굴함을 보여주고 있었어요. 아무래도 거액의 지원금을 받고 치르는 행사이니만큼 시의 입김에서 자유로울 순 없었겠지요. 자립하려고 하기보단 시 지원금에 행사 시행의 목을 내놓고 있는 상황이라니.”

실제로 그랬다. 시의 지원금이 끊긴 어느 해는 건축문화제를 건너뛰기도 했던 것. 이 대표는 인천건축문화제가 더 이상 관주도형에서 머물 것이 아니라 소규모가 되더라도 자생적, 독립적 위상을 갖춰야 한다고 역설했다. 시민사회에 이렇다 할 도움을 주지 못한다면 건축사의 지위향상에라도 기여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이 대표는 지하상가 리모델링 디자인 경력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동인천 중앙로지하상가, 신(新)부평역지하상가, 석바위지하상가, 주안역지하상가가 그의 손에 의해 리모델링된 사례다. 최근에는 인천대에서 지구단위계획과 도시경관 전문가 과정을 수료하는 등 건축사의 업역 확장의 가능성을 열어놓은 채 쉼 없이 공부에 열중하고 있다. 그런 이 대표지만 그가 인천에서 건축가로서의 길을 트게 된 배경에는 개척교회의 새 성전 프로젝트를 기획단계부터 설계, 시공에 이르기까지 가이드라인을 만들어 주고, 그것을 실현하는 과정을 빼놓고 얘기할 수 없을 것이다.

1997년, 98년 사회 전체가 외환위기로 자금압박을 받을 때 이 대표는 오히려 상가에 세 들어 살고 있던 300여 개척교회를 상대로 한 적극적인 마케팅으로 당시의 고비를 순탄하게 넘긴 바 있었다. 이후 설계비 덤핑을 무기로 덤벼든 지역 내 경쟁업체들의 출현과 그러한 정황을 교묘하게 이용하는 교회 클라이언트에 식상한 뒤로는 더 이상 교회건축의 설계를 하지 않고 있다.

인하대 건축공학과를 졸업하고 동대학원 석사과정을 마친 그가 처음 건축설계사무소에 인연을 맺은 것은 독립기념관의 설계자로 잘 알려져 있던 김기웅의 삼정건축이었다. 이 대표는 그 때에 만난 선배건축가로 박영건, 오학선, 안명제 씨 등을 꼽는다. 사회에 나가 처음 만난 건축가들로부터 그의 작가적 기질이 움텄던 것이다. 가급적 대학동문들이 없는 설계사무소를 선택하고 싶었다는 그는 그곳에 있으면서 착실하게 디자이너로서의 능력을 연마한다.

독립기념관 설계가 끝나는 시점에 팀원의 80%가 삼정건축을 이탈하게 되는데 그 또한 진원건축으로 독립하던 박영건을 쫓아 나선다.

그러다가 1989년 인천의 태건축이 지역의 설계업체로서는 처음으로 관급공사인 서구청 현상설계에 임하면서 그를 인천으로 불러낸 것이 계기가 되어 인천에서의 그의 건축여정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92년 4월, 그는 동료들과 함께 현재의 두인건축을 설립했다.

백문불여일견(百聞不如一見)이라 했던가. 그가 처음 인천에 둥지를 틀고 돌아봤던 때의 지역 건축계의 인상, ‘인천에는 디자인을 하는 건축사가 없더라’. 그의 건축은 어떻게 다른가 궁금했다.

그와 함께 돌아본 곳은 남동구 구월동의 소규모 근생건물과 연수구 동춘동에 위치한 연수여고 다목적강당이었다. 통상의 건축가들이 학교 내 건축물의 설계를 가장 힘들어한다는 말을 들어왔던 터라 그에게 같은 질문을 던져보았다.

“하핫, 저도 그런 적이 있어요. 한번은 담당이 전혀 움직이지 않기에 교육청 민원실에다가 설계안을 접수시켜놓고 결과를 알려달라고 했던 초유의 사례를 빚기도 했어요.”

도로에 면한 다목적강당(연학관)은 붉은 벽돌 바탕의 외벽에 장식된 돌의 면성과 대공간을 싸고 있는 완곡한 경사면 지붕으로 지역사회와 관계맺음을 하고 있고, 운동장 쪽으로는 기둥의 구조체를 돌출시킨 채 외벽의 일부를 셋백(set back)시키는 디자인수법을 보여주고 있다. 주동선을 담아내는 서북향의 돌출계단실에 최대한의 빛을 담아내어 계단실 홀을 학생들의 커뮤니티마당으로 제안하고 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

2002∼2003 인천건축도시주간 커미셔너를 역임하고, 현재 인천시 경관위원회 위원으로도 활약하는 그의 건축관을 이해하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전진삼(건축비평가, 격월간 건축리포트<와이드> 발행인, 광운대 겸임교수)

저작권자 © 인천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