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생활 20년이 넘었다. 이제 그만해도 충분한기라.”

지난달 말 설 연휴가 끝나고 만난 최기선(64) 전 인천시장은 “졸업(정계은퇴)했는데 학교에 다시 가는 게 말이 되냐”며 더 이상 정치에 발을 들여놓을 뜻이 없음을 분명히 했다.

서슬 시퍼렇던 80년대 군부독재 시절 김영삼 전 대통령과의 인연으로 정계에 입문한 최 전 시장은 스스로도 후회 없는 정치 인생을 살았다고 말한다.

최 전 시장은 인천의 오랜 숙원사업이었던 선인학원의 시·공립화를 비롯해 송도신도시 착공, 인천TV방송국 개국, 인천국제공항 명칭확정, 월드컵 경기 유치 등 수도권 위성도시로 머물러 있던 인천을 동북아의 주역도시로 발돋움 시키는데 크게 기여한 것으로 평가 받고 있다.

최 전 시장은 관선 마지막 시절인 지난 1993년부터 민선 2기인 2002년까지 10년 가까이 인천시장으로 재임, 역대 최장수 기록을 남겼다.

아직도 그를 보면 시장님 하며 손을 건네는 시민들이 상당수다.

미국 발 금융위기로 시작된 경제위기로 각종 경제지표마저 끝모를 나락으로 추락하고 있는 현실에서 격동의 세월을 헤쳐 온 그의 인생 행보를 되돌아 본다.



# 성대 결절수술로 많은 고생을 한 것으로 알고 있다. 요즘 건강과 근황은 어떤지.

-지난 2002년 퇴임 후 6년 가까이 자연인으로 살았다. 목소리도 다소 나아지는 등 건강은 괜찮은 편이다. 매일 집에서 소래포구까지 6㎞ 가량을 걷는다. 예전에 자전거를 탓는 데 어쩌다 잃어버리고 나서 걷는 재미에 푹 빠졌다. 지난 2004년부터 인천대 석좌교수를 맡고 있고 지난해부터 미국 게일사와 국내 포스코건설의 합작법인인 송도국제도시개발유한회사(NSIC)에서 비상근 고문으로 활동하고 있다. 오래전부터 고문을 맡아달라는 요청이 있었지만 고사하다 수락했으며 자유스런 입장에서 조언 정도 하고 있다.

# 인천시장 재임시절 ‘두주불사’일 정도로 술을 많이 마셨던 것으로 기억한다. 요즘도 술을 많이 드시는가.

-지금도 많은 사람들을 만나다보니 술자리는 종종한다. 그러나 예전처럼 말술을 마시지는 못한다. 재임시절 가장 많은 술을 마셨던 기억은 지난 1993년 YS정권 때 한중수교가 이루어지고 인천시가 지방자치단체로는 처음 중국시장 공략에 나섰을 때다. 당시 130명에 달하는 시장개척단을 이끌고 자매결연을 신청한 중국 5개 도시를 방문해 술을 엄청나게 마셨다. 당시 상대했던 중국 관계자들은 술로 나를 제압하려는 의도도 있었겠지만 결국 성공(?)하지 못했다. 술을 바닷물 보다 많이 마신다고 해서 ‘해량(海量)’이란 별명을 얻었을 정도다.

# 김영삼 정부 출범과 함께 인천시장으로 부임했는데.

-관선 인천시장으로 부임한 것은 지난 1993년 2월 25일이다. 당시 YS가 2년 후 실시될 민선시장 선거를 앞두고 시험적으로 정치인 출신인 나에게 시장직을 맡긴 것 같다. 전국 16개 시·도를 통틀어 그 때까지만 해도 고위관료 출신이 아닌 정치인 출신이 단체장을 맡은 것은 처음이다. 시장으로 부임해 첫 출근하는 날 시청 현관에 도열해 있는 간부 공무원보다 방호원들에게 먼저 악수를 건넸다. 관료사회에 적잖은 충격으로 받아들여졌던 것 같다. 당시 시청 정문에 있던 바리케이드 철거를 지시, 그동안 폐쇄적인 행정을 시민에게 개방하고 문제가 야기된 집단민원현장에 먼저 달려가 문제해결에 나섬으로써 시민에게 문민정부의 출범을 실감케 할 수 있었다.

# 시장으로 부임하면서 느꼈던 소감이나 각오는 어떠했는가.

-인천을 동북아 중심도시로 발전시켜야 한다는 소명의식을 크게 느꼈다. 19세기 말 열강이 각축하는 과정에서 제대로 대응했다면 인천은 동북아 중심지로 자리잡을 수 있는 가능성이 있었지만 우리는 식민지로 전락한 아픈 역사를 지니고 있다. (역사를 돌아보고 의미를 부여하는데 많은 시간을 할애한 뒤)우리는 실패를 거듭해서는 안된다고 스스로 다짐했다. 항만, 공항, 정보도시를 의미하는 ‘트라이 포트’계획도 이러한 차원에서 세웠고 중앙정부를 설득해 송도신도시 건설에 착공할 수 있었다. 또 하나 인천시민의 긍지와 자부심을 높여야 한다는 점에 주목했다. 부임 직후 시민의식조사를 실시해 본 결과 15%만이 직할시민으로서의 자부심을 느낀다고 답했고 대부분이 생활이 나아지면 인천을 떠나야겠다는 생각을 갖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러한 패배의식을 떨쳐내고 시민으로서의 자부심 회복과 더불어 사회정의를 바로 세워야 한다는 생각에서 선인학원 시·공립화를 추진했다.

# 북구청 세무비리사건에 책임을 지고 관선시장에서 물러났는데.

-북구청 세무비리는 공무원들이 짜고 세금을 통째로 떼먹은 도둑질이었다. 전 국민이 분노한 것은 물론 내 스스로도 커다란 충격을 받았다. 시 직원들에게는 흔들리지 말고 맡은바 소임에 충실하라고 의연한 척 했지만 밤잠을 자기 어려웠다. 결국 정치인으로서 법적·행정적 문제를 넘어 정치적·도의적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결론을 내리고 휴가차 청남대에 머물던 YS에게 전화로 알렸다. (그는 곧 민선시장선거가 있기 때문에 결단이 쉬웠던 것 아니냐는 질문에는 ‘그런 측면이 있었을 수도 있고’라며 빙긋 웃었다)

# YS와의 특별한 인연이 있었던 것으로 안다. 당시 기억에 남는 사건이 있다면.

-10·26 시태로 박정희 정권이 종말을 고하고 이른바 ‘서울의 봄’이라 불렸던 정치 격변기 때 김영삼(YS) 신민당 총재의 외신담당 공보비서로 일하게 됐다. 당시 언론 및 정치자유 등 5개항을 요구하며 단식투쟁이던 YS가 군부에 의해 강제연행 됐을 때 이 소식을 가장 먼저 외신에 알렸다. 그 당시 (자신도)가택 연금으로 외신기자를 접하기 힘든 상황이었지만 다행히 통화는 가능했다. YS의 강제연행 사실이 전 세계 언론에 타전되면서(세계 유수의 언론에 한국의 야당 지도자의 행방이 묘연하다 등의 기사가 게재됐다며) 국제여론의 이목을 한국 민주화에 집중시킬 수 있었다. 결국 신군부가 국제사회의 압력에 굴복해 (측근들의)가택연금을 해제하고 서울대병원 12층에 있던 YS 면담을 허락했다. 단식 20일 째 접어들고 의사들도 목숨이 위험하다고 했을 때 YS에게 단식 중단을 간곡히 요청하자 YS는 내 귀에 대고 ‘내 몸은 내가 잘 안다’고 말한 뒤 23일 째 단식을 끝냈다.

# 지난 1998년 지방선거에서 자민련 간판으로 시장에 당선됐다. 이후 2006년 지방선거 때는 열린우리당 후보로 출마, 당적을 둘러싼 철새 논란도 있었는데.

-YS의 상도동계에 몸을 담고 있었지만 민추협 시절 DJ의 동교동계와도 친하게 지냈다. DJ 집권 후 나는 새천년민주당 공천으로 인천시장에, 임창렬씨는 자민련 공천으로 경기도지사에 출마하기로 결정됐는데 JP가 인천 몫을 고집하면서 자민련에 입당할 수밖에 없었다. 2006년 지방선거 때도 마찬가지다. 성대 결절수술로 도저히 선거에 나설 수 있는 처지가 아니었다. 정동영 대표와 문희상 의원이 여러차례 찾아와 출마를 독려했지만 거절했다. 하지만 집권여당이 후보를 내지 못하는 절박한 상황에 처했는데 끝내 모른 척 할 수 없었다.

# 대우그룹 유치과정에서 많은 고충을 겪은 것으로 안다. 또 인천의 미래 비전이라 할 수 있는 송도국제도시에 대한 당초 구상은.

-김우중 전 대우그룹 회장과 송도유원지에 102층 건물을 지어 본사를 유치키로 의기투합이 돼 있었다. 그러나 대우가 IMF 시절 그룹이 해체되고 본사 유치가 어렵게 됐다. 더욱이 그룹 본사를 유치하기 위해 유원지 부지를 상업 및 주거용지로 변경해 주면서 각종 특혜시비에 휘말려 개인적으로도 큰 곤혹을 치뤘다. 송도국제도시는 인천을 동북아 중심도시로 만들기 위한 프로젝트다. 지난 1888년 인천 조개지에 들어선 만국공원은 미국과 일본, 러시아, 청나라, 독일 등 5개국이 건립한 비즈니스 센터의 역할을 했다. 120년이 지난 이제는 송도국제도시가 ‘팍스-아시아’의 중심이 되어야 한다.

# 경제가 상당히 어렵다. 경제난 극복을 위해 가장 시급한 과제는 무엇이라 생각하는지 조언을 부탁한다.

-주변을 돌아보면 우리 이웃의 상당수가 소규모 자영업을 하고 있다. 심각한 경제난에 이들이 엄청난 어려움에 처해 있고 절망적인 서민들도 많다. 정부차원의 경기 부양책도 중요하지만 지역 특색을 감안한 지방정부 차원의 노력도 필요하다. 지역 일자리 창출과 소규모 자영업자를 위한 경기 부양책이 절실하다. 지건태기자 jus216@i-today.co.kr

최기선 前시장은

▲학력

1958년 김포 서암초등학교 졸업

1961년 서울 중앙중 졸업

1964년 보성고 졸업

1964년 서울대 법대 입학

1973년 민주화 투쟁으로 뒤늦게 대학 졸업

▲경력

1979년 신민당 총재 공보비서로 정계 입문

1984년 민추협 대변인

1985년 신한민주당 정책위원

1988년 13대 국회의원/ 통일민주당 총재 비서실장

1990년 민주자유당 부대변인

1993년 제7대 인천직할시장

1995∼1998년 민선 초대 인천광역시장

1998∼2002년 민선 2대 인천광역시장

▲저서

혼자된 약속(95)·깨어나는 지방은 아름답다(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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