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에서 언제 어디서든지 부담 없이 시켜먹을 수 있는 음식은 바로 자장면일 것이다. 자장면은 유래로 따지면 우리나라 음식은 아니다. 하지만 자장면은 외국인들에게 한국에서 한번쯤은 먹어봐야할 음식 중 하나로 자리매김하고 있을 정도로 한국에서 빼놓을 수 없는 명물이 되었다.

자장면을 우리나라에 널리 퍼뜨린 장본인은 바로 화교들이다. 한국 화교들의 요식업 사업의 전파는 외식문화가 다양하게 발전한 오늘날에도 막강한 영향을 미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 생각해 볼 점이 있다. 화교들이 시작한 중국식 음식점이 전국 어디에서든 찾을 수 있을 정도로 성장한 것은 굳이 예를 들지 않더라도 누구나 알 수 있다. 그렇다면 그 중국집의 원조인 화교들은 그만큼 성장했어야 하는 게 자연스러운 이치 아니었을까? 분명 한국 화교들의 중국 음식점은 우리나라의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에게 많은 인기를 누렸다. 하지만 5· 16 이후 화교들에게 날벼락이나 다름없는 일이 벌어진 것이다.

첫 번째 폭풍은 바로 1961년, 외국인 토지 소유 금지법이다. 외국인 토지 소유 금지법은 외국인의 토지 소유를 완전히 금지시켰다. 따라서 화교들은 중국 음식점을 소유하는 것이 완전히 금지 된 것이었다. 집과 가게를 빼앗기게 된 화교들은 고육지책으로 한국 지인을 찾아서 명의를 빌리는 방법을 택했다. 하지만 이 역시 외국인 외환 규제 정책 때와 같은 불화를 낳기도 했다. 외국인 토지 소유 금지법은 1968년 개정되어 1세대 1주택에 한하여 주거목적 200평, 상업용 40평 이내에서 사전 신고만으로 취득이 가능해졌다.

그리고 그런 와중에 경제개발 계획이 화교들의 요식업을 가로 막았다. 먼저 도시계획으로 인해 큰 길가에 있던 대부분의 중국 음식점은 철거대상이 되었다. 또한 경제개발을 목적으로 한 국민 생활 변혁 방침의 하나로 절미 운동을 시작했다. 이는 쌀 소비량을 규제하여 음식점에서 밥을 파는 것을 제한하였다. 뿐만 아니라 국수류의 공급도 어려워 당시 중국 음식점의 30%가 휴업의 위기에 처했었다.

절미운동만으로도 큰 타격이었는데 1973년에는 쌀밥 판매 금지령까지 내렸다. 쌀밥 판매 금지령은 양식, 한식 등의 음식점은 쌀밥을 취급할 수 있는데 중국 음식점에서는 쌀밥을 판매할 수 없다는 내용이었다. 무역업과 마찬가지로 화교들을 정책적으로 차별했던 것이다. 하지만 화교 요식업 협회와 화교 협회, 중국 대사관의 진정으로 쌀밥 판매 금지령은 3개월만에 해제되었다. 이렇게 숱한 어려움이 화교들에게 닥쳤지만 그 속에서도 아직 많은 화교 요식업자들이 남아 중국 음식점을 운영하고 있었다. 하지만 한국 화교의 요식업에 불어 닥친 폭풍은 아직 끝난 것이 아니었다. 박정동 인천대 중국학연구소장·이승훈 연구원

1970년대 이후 요식업 현황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 국민 소득 수준이 높아지고, 관광사업이 확대되면서 대형 중국음식점에 투자하는 우리나라 사람들이 늘어났다. 반면에 한국 화교 요식업은 더욱 어려워지게 된다.

그 첫 번째 이유는 바로 인정과세(認定課稅)였다. 우리나라 정부는 경제국방건설에 필요한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세수를 확대하는 과정에서 요식업에 인정과세를 실시했다. 인정과세란 세금 신고를 하지 않았거나 부당하게 세금 신고를 했을 시에 정부에서 직접 조사한 자료에 의해 세금을 책정하는 방법이다. 물론 이 과정에서 외국인으로서의 차별 또한 존재했을 것이지만, 차별이 없었다고 할지라도 화교들에게 큰 손실이었다. 이 인정과세에서는 한 장소에서 오랜기간 영업을 하면 영업연수에 비례해서 세율이 차등부과 되었다. 이것은 1950년대부터 음식점을 경영해 온 화교들에게 특히 불리하게 작용하였다. 또한 임대소득세율도 화교들에게 불리하게 작용했다. 대부분의 한국 화교들은 외국인 토지 소유 금지법으로 인해 한국인의 건물을 임대하여 중국 음식점을 운영했다. 그런데 임대소득세율을 인상하자 소유주는 그 인상한 분량을 화교들에게 전가한 것이다.

두 번째 이유는 인력난이었다. 한국 화교 요식업이 크게 증가하자 화교들은 한국인들을 다수 고용하였다. 한국인은 근면했을 뿐 아니라 당시에는 화교보다 임금이 낮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경제수준의 성장과 함께 종업원의 임금도 전반적으로 상승하여 전처럼 쉽게 인력을 구하기가 어려웠다. 또한 한국인이 운영하는 중국 요리점이 경쟁상대로 등장한 것이다. 화교들에게 고용되었던 한국인들은 주로 보조 요리사로 채용되었다. 그들이 요리법을 익힌 뒤 새로이 창업해 화교들의 경쟁자로 등장한 것이다.

세 번째 이유는 외국인으로서의 영업에 많은 제약을 받았다는 것이다. 일단 화교들은 영업지역의 제한을 받았다. 정부는 화교 음식점 개설 지역을 엄격히 통제하였다. 예를 들면 서울의 경우 중구, 종로구, 서대문구의 일부만을 개방지역으로 두고 나머지 지역에서는 엄격하게 통제하였다. 또 음식점의 인가권 이전도 제한되었다. 예를 들면 화교가 운영하는 음식점을 한국인이 인수할 수는 있지만, 한국인이 운영하는 음식점을 화교가 인수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그래도 대형 음식점의 경우는 경기가 중소형 음식점에 비해 나은 편이었다. 그런데 1980년대에 들어서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한국 관광사업의 발달로 큰 관광회사들이 직접 중국음식점을 설립하였다. 또한 서로 유명한 요리사를 스카우트하기 위해 경쟁을 벌여 그로 인해 대형 음식점도 불경기를 겪게 되었다.

이와 같은 한국의 악조건으로 많은 한국 화교 음식점이 문을 닫았고 또 그 중 대다수가 미국으로 이주했다. 이처럼 화교 중국 음식점의 감소가 계속되다가 1990년대 초반이 돼서야 화교 요식업자들의 숨통이 트였다. 경쟁압력이 줄고 세금부담도 상대적으로 가벼워 졌으며, 가격자유화 조치가 취해져 한국 화교의 음식점 경기가 다소 나아졌다. 하지만 인력난은 오히려 가중되어 조선족을 고용하는 등의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해 나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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