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정치권 일각에서 광복절을 건국절로 바꿔야한다는 법안을 발의하면서 논란이 일고 있다. 정부도 8·15 기념식을 ‘건국 60주년’에 중점을 두고 기념사업을 추진하고 있다. 일선 지자체들도 이에 부응, 일사분란하게 태극기 달기운동을 전개하고 있다.

정부는 8·15 행사명을 ‘대한민국 건국 60주년 및 광복 63주년 경축식’으로 정했다가 광복회 등에서 반발하자 광복을 앞으로 빼 ‘광복 63주년 및 대한민국 건국 60주년 경축식’으로 바꿨다.

‘광복-건국’ 논란은 소송으로도 번지고 있다. 독립운동가 후손들로 구성된 ‘대한민국 임시정부 기념사업회’를 비롯한 55개 단체가 헌법재판소에 ‘광복절을 건국기념일로 바꾸고 대한민국 건국 60년 기념사업위원회가 추진하는 건국행사는 헌법 위반’이라며 헌법소원을 제기하고 나선 것.

과거를 아는 자가 미래를 볼 수 있다고 했다. 논란이 제기되고 있는 만큼 지난 날을 보는 시각은 더욱 객관적이고 냉정해야 한다는 지적이다. 태극기 달기 등 전국적인 ‘캠페인’이 요식행위로 비치지 않으려면 광복절의 의미를 되짚어보면서 반추하고 지향해야 할 가치를 골라내야 한다는 게 중론이다. 1945년 8월15일, 해방을 맞았던 무렵의 인천을 더듬어본다.




▲광복1주년 ‘인천시민경축대회’

◇인천, ‘가난한 조선의 프로필’

국가보훈처 이현주 연구관은 해방을 맞은 인천엔 남다른 점이 있었다고 한다. 최초의 개항장으로 외국인 전용거류지가 형성돼 많은 일본인이 거주했고, 식민지근대화의 첨병역할을 자임했던 곳이 인천이었다. 해방 이후에도 같은 운명이었다. 제일 먼저 미군의 점령을 경험한 곳이기 때문이다.

미군정은 시장을 선출하고 행정기구를 정비하는 등 시정을 장악했고, 시 행정을 맡은 한국인의 대부분은 일본인 밑에서 일하던 인사였다. 해방전후 좌익은 이들에 대한 비판과 견제를 강화하는 한편 신탁통치 파동 등 극한적 대치가 지속됐다.

이런 상황에서 민생이 존재할 틈이 없었다. 1945년 10월23일 오전 11시30분쯤 주안역 철로위에서 10대 소년 4명이 폭사한 사건이 발생했다. 미군의 신물품이 마냥 신기했던지 철로 인근에 놓인 수류탄을 통조림인양 다뤘던 것으로 대중일보가 보도했다.(1945년 10월26일자) 경찰도 철도선로에서 생긴 사건이라 크게 주목했다고 한다.

이에 앞서 경찰과 미군헌병은 미군이 본격 상륙하면 일반인들이 미군의 물건을 고가로 사는 경향을 보이고, 특히 잔류일본인들이 아이들에게 돈을 줘 물품을 사도록 할 것이라며 미군물품을 매수하면 징역에 처한다고 전했다.(같은 신문, 1945년 10월11일자)

1946년엔 전국적으로 호열(콜레라) 환자가 급증했는데, 인천도 예외가 아니었다. 인천의 호열환자는 밀항선과 기차여행자 등으로 병균이 전파, 특히 신포동 등 도심지에 만연했고 호역환자 탈주 소동이 빚어지기도 했다. 또한 해방후 소록도의 나병환자 다수가 인천으로 이주해와 경찰과 미군정이 소록도로 이송하기에 바빴고, 무질서한 혼란기의 틈바구니 속에 먀약중독자도 급증해 경찰이 대대적인 단속을 벌이기도 했다.(같은 신문, 1946∼1947년)

당시 신문 등 기록엔 해방을 맞이했지만 단지 일제에서 놓여져 있을 뿐 ‘인천의 진정한 해방’을 염원하는 글이 눈에 띈다. 특히 ‘무능을 배격하고 유위(有爲)의 인물을 추천하는 것이 시민의 의무’라는 등 군정의 비애가 표출됐다.

“사진잡지에서 본 향항 야경을 기억하고 있다/그리고 중일전쟁때/상해부두를 슬퍼했다//서울에서 삼천 킬로를 떨어진 곳에/모든 해안선과 공통되어 있는/인천항이 있다.//가난한 조선의 프로필을/여실히 표현한 인천항구에는/상관도 없고/영사관도 없다//따뜻한 황해의 바람이/생활의 도움이 되고저/냅킨 같은 만내로 뒤어들었다.//해외에서 동포들이 고국을 찾아들 때/그들이 처음 상륙한 곳이/인천항구이다.//그러나 날이 갈수록/은주와 아편과 호콩이 밀선에 실려오고/태평양을 건너 무역풍을 탄 칠면조가/인천항으로 나침을 돌렸다.//서울에서 모여든 모리배는/중국서 온 헐벗은 동포의 보따리같이/화폐의 큰 뭉치를 등지고/황혼의 부두를 방황했다//밤이 가까울수록/성조기가 퍼덕이는 숙사와/주둔소의 네온싸인은 붉고/짠그의 불빛은 푸르며/마치 유니온 작크가 날리든/식민지 향항의 야경을 닮아간다//조선의 해항 인천의 부두가/중일전쟁 때 일본이 지배했던/상해의 밤을 소리없이 닮아간다.”(박인환, 인천항, ‘신조선’ 1947)

‘목마와 숙녀’로 유명한 박인환은 해방 이후 인천항을 ‘가난한 조선의 프로필’이라고 했다. 개항, 일본의 식민지, 미군정, 인천상륙작전 등 근·현대사의 굴곡을 지닌 곳이 바로 인천이다. 해방을 맞았건만 인천은 식민도시였던 상하이를 닮아가고, 성조기가 펄럭이고 있었다.

소리높여, 눈물 흘리며, 감격스럽게 ‘대한독립 만세’를 외쳤다. 하지만, 시인의 눈엔 인천은 어느새 쇠락하고 가난한 모습이 포착되고 말았다. 미군정이 대안이 아니었음을 에둘러 표현했다.

‘해방은 우리가 자고 있을 때에 도적같이 왔다’는 함석헌의 말대로 우리 민족은 해방을 맞을 준비를 하지 못했던 것이다. 일본제국주의를 대신해 북엔 소련군이 남엔 미군이 주둔하는 등 분단의 비극이 싹텄던 때다.

‘광복-건국’ 논란이 15일을 지나면 어떻게 전개될지 귀추가 주목된다. 논란이 정치적 싸움으로 번지기보단 생산적 토론으로 이어져야 한다. 인천엔 아직까지도 친일의 망령이 배어있다. 부평미군부대 땅을 조상의 재산이라며 찾겠다고 소송을 벌이는 친일파 후손이 있고, 남동구엔 일제 강점기에 강제징용됐던 사할린 거주 한인동포들이 있다. 건국60주년을 맞아 인천 곳곳에 태극기가 휘날리고 있는데 지난 역사를 되돌아보며 가질 것과 버릴 것을 따질 수 있는 혜안이 필요한 시점이다.

김창문기자 asyou218@i-today.co.kr

자료참조=인천학연구원

사진제공=인천시역사자료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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