릴레이 인터뷰-9.김병균 극단 ‘동이’ 대표

대학시절 선배따라 연극반 동아리에 갔다가 엑스트라로 무대에 선 것이 그만 사단을 냈다. 그날 이후 연극에 묻혀, 때론 미워하기도 하며, 연극쟁이로 한 길을 걸어왔다. 처음부터 삶을 작정한 것도 아니다. 작품을 만들고, 극단을 창단하고, 소극장을 열고 닫았다. 이제 막 40줄에 들어선 김병균 극단 ‘동이’ 대표는 오늘도 연극을 생각하며 깨어나 연극을 생각하며 잠자리에 든다.

▲소극장 ‘가온누리’

소극장 ‘가온누리’를 생각하면 마음 한켠이 아려온다. 중구 카톨릭회관 인근에서 운영하다 결국 3년6개월만인 지난해 8월 문을 닫았다. 원인은 운영난이 제일 컸다.

“인천에서 연극을 하면서 가장 힘들었던 것은 장기 공연을 할 수 있는 공간이 없다는 현실이었습니다. 인천종합문예회관에서 대관 받는 일이 쉽지 않을 뿐더러 그마저 3~4일 이상은 꿈도 못꿉니다. 몇달을 공들여 만든 작품을 올리자마자 내려야하므로 제작비를 뽑는 것은 애초부터 기대할 수 없는 노릇인데다, 관객동원도 불가능했습니다. 스스로 답을 내자 해서 소극장을 열었습니다.”

포부가 컸다. 다양한 관객과 일상적으로 만날 수 있는 공간을 만드는 것 이야말로 지역내 문화운동이 나아갈 길이라는 데 생각이 꽂혔다. 나름대로 치밀할 계산을 했다. 대부분 극단들도 같은 속앓이를 하는 것은 자명한 일. 극단 ‘동이’의 실험극 틈틈히 이들 극단에게 대관을 하면 상설 운영엔 무리없을 것으로 예측했다.

후원회에 기대를 걸었다. 후원회를 조직해서 극장을 운영하고 있는 부산의 성공사례를 차용했다. 회원들이 자발적으로 낸 회비로 여타 경상비를 충당하는 방식이다.

“개관하자마자 100인 후원회를 목표로 했습니다. 소극장에 애정을 갖은 사람 100인을 못 모으겠냐 싶었거든요.”

두가지 모두 실패했다. 3년6개월동안 외부 극단의 대관신청은 달랑 한 작품, 한달공연에 그쳤다. 후원회도 취지를 공감하는 20여명을 가까스로 모았으나 회비를 내는 이는 몇에 불과했다.극장을 놀릴 순 없다는 것이 운영의 제 1원칙이었다. 자체 극단 ‘동이’가 채우는 것 외에 방법이 없었다. 한 작품을 올리고 공연하는 동안, 다른 작품을 준비하고, 부랴부랴 연습해 다시 올리는 악순환이 되풀이 됐다.

“극을 쓰고 연출하는 것이 제 몫입니다. 쉬지 않고 달려왔습니다. 배우들도 못할 일이죠. 변변한 개런티도 못받으면서 중노동을 하고 있는 셈이니까요. 내가 마치 연극을 찍어내는 공장장 같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물론 제작비 충당도 힘들었습니다.” 시간이 갈수록 느는 것은 빚이었다. 더불어 피로도 쌓여만 갔다. “답은 문을 닫는 것이었습니다.”

▲아픈만큼 사고가 커지다

극장안에서 매몰 돼 쳇바퀴 구르듯 지내온 일상을 깨고 나오자 오히려 인천 연극을 위해 할 수 있는 일들이 보였다. 또 다른 접근방식으로 문화운동을 잇는 것이 가능하게 느껴졌다.

작은 단위 마을축제를 일궈보자는 데 생각이 미쳤다. “연극이란 사람과 사람이 만나 호흡을 주고받아야 만들어지는 것이죠. 이처럼 작은 마을축제란 어른 아이가 마치 연극 연습하듯 만남을 통해 한편으로는 마을의 역사성을 공유하면서 놀이판에 참여하는 것을 지향합니다. 내가 살고 있는 마을에 대한 개념을 만들어내고 같이 공유하는 진정함이 있는 만남축제, 그 자체가 연극입니다.”

같은 맥락에서 연극인들이 나서서 꾸미는 축제를 제안했다.

“지역 극단 대부분이 인천시로부터 문화예술육성기금을 받으면 이에 맞춰 관성적으로 작품을 만들어왔습니다. 자발적 요소가 사라진지 오래죠. 관객과의 만남을 소중하게 여기고 그런 만남을 만드는 것을 책임으로 느끼는 ‘우리’가 모여 축제를 한판 일궈보자고 제안을 했습니다.”

예총과 민예총을 망라해 20여 극단이 공감을 했다. 조직위원회를 꾸리고 행사를 짜고, 해서 탄생한 것이 제1회 ‘인천 비타민 연극축제’다. 지난 8일 개막, 다음달 13일까지 남구 학산소극장을 주무대로 지역 곳곳에서 거리공연을 펼친다.

“비타민처럼 우리몸에 필요한 연극을 지향하죠. 관객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 찾아갑니다. 그곳이 곧 무대가 되는 겁니다.”

▲대학시절 연극에 몰입하다

“연극으로 먹고살게 될 줄은 정말 몰랐다”며 호탕한 웃음을 웃는다.

오히려 그림을 그리고 싶었다고 말한다. ‘밥벌이가 안되는 그림쟁이’란 이유로 부모 허락을 못받자 교육대학으로 진로를 정한다. 내심 미술교육과를 선택하면 되겠거니 했다.

“입학하자마자 과를 선택하는 과정에서 어긋나고 말았습니다. 3지망까지 써내라 해서 마지막난에 장난스럽게 음악교육과를 적었는데 그만 3지망으로 낙점된 겁니다.”

악보하나 제대로 볼 줄 모르는 그에게 이제 학과공부는 뒷전일 수밖에 없었다. 연극동아리 선배 유혹에 무대에 섰는데, 왠걸 적성에 맞았다. “몰두 할 곳이 연극밖에 없었어요. 1학년 내내 연극하러 학교에 갔습니다.”

이듬해 학교 당국이 대대적으로 서클 해체작업에 나선다. 이에 맞서 교내 민주화투쟁이 일었다. “얼결에 비상대책위원장을 맡았어요. 학교당국과 싸워 결국 이겼습니다. 연극반을 지켜냈으니 더욱 열심히 활동했지요.”

이는 그에게 중요한 전환점으로 다가왔다. 연극이 사회속에서 어떤 의미로 역할을 해야하는 지 고민하기 시작한다. 사회운동으로서 연극을 다시보게 된 것이다. 혼자가 아닌, 함께 고민하고 풀어야 문제였다. 서울지역 타 대학 연극동아리에 눈을 돌렸다. 진보적 예술운동에 공감하는 대학생들을 모아 ‘서울지역대학극연합’을 결성한다.

“예술과 사회가 어떤 긴장관계를 유지해야하나 끊임없이 고민을 했죠. 사회주의 이념공부도 하고, 무대에서 실험극을 해보기도 했죠. 이때 세상을 보는 안목이 넓어졌습니다.”

▲연출데뷔작은 노동연극

사회 첫발을 내딛은 곳이 극단 ‘한강’이다. 학내 사태로 제적, 군입대, 복학을 거치면서 갈 길을 이미 연극으로 정한 그였다.노동문화운동연합회(노문연) 출신들이 만든 극단이다보니 관심이 노동연극에 닿아 있었다. 예술의 가치를 사회변화와 혁명에 일조하는 데서 찾았다. 대상은 치열한 삶을 사는 노동자에 맞췄다.

“연출 데뷔작이 ‘나마스떼’란 제목의 외국인 노동자 삶을 다룬 작품입니다.”

당시 외국인노동자들이 인권을 내세우며 처음으로 농성을 한 사건이 발생했다. 그들의 삶이 노예로 팔려온 것과 다를바없이 비참하다는 데 경악했다. “연극으로 세상에 알리는 것이 내게 주어진 일이라는 생각에 다다랐습니다.”

당시 그가 그리고자 하는 작품세계는 온통 이 사회에서 숫적으로 가장 많은 노동자에 맞추어져 있었다.

▲무대를 인천으로…

“연극을 하면 가난한 것이 미덕이라고 당연시하는 것이 싫어서 극단에 출근하기전 새벽 우유배달에, 종종 대학극 아르바이트 연출을 맡았지요. 그런데 힘에 부쳤습니다. 평생 연극을 하려면 아예 1년쯤 쉬면서 기틀을 마련해보자 생각했습니다.”

그렇게 ‘한강’을 떠났다. 계획과 달리 좀처럼 복귀가 힘들었다. 이 때 과천 세계마당극 페스티벌 주최측으로부터 공연국 차장을 맡아달라는 제의가 온다.

“9개월동안 프로그램 엮는 일을 했습니다. 참가작을 고르느라 외국 극단 출품작 500여편을 보았어요. 깜짝 놀랐습니다. 연극이 그처럼 폭넓고 자유로울 수 있다는 것은 가히 충격이었습니다.”

일을 마치고 날 때쯤 사고가 예전과 확실히 변해있음을 자각했다. 그동안 추구했던 작품세계가 얼마나 관념적이고 보수적임을 깨닫게 됐다. “연극을 해야겠다는 열정이 속 깊은 곳에서부터 솟구쳐오르는 것을 느꼈습니다.”

인천 연극이 형편없다고 폄하하는 주위의 말들이 늘 귀에 거슬렸던 그다. 결론이 ‘인천에서 하자’였다. 부랴부랴 극단 ‘동이’를 창단했다. 정서적으로 가까운 인천민예총에 적을 두고 연극분과 조직을 제안한다. 이듬해 연극위원회가 탄생한다. 현재 그에게 붙여진 직함 극단 ‘동이’ 대표와 인천민예총 연극위원회 위원장의 연원이 그 지점에서 비롯된 것이다.

김경수기자 ks@i-toda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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