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순휘 (정치학박사, 한국문화안보연구원 부원장)

1902년 12월 22일 조선 최초로 하와이 첫 이민자 121명이 인천 제물포항에서 떠났다. 당시 일본배(겐카이마루)를 타고, 일본 나가사키항으로 2일간 항해했다. 12월 24일 나가사키 검역소에서 신체검사와 예방접종을 받는 과정에서 19명이 탈락하였다. 그래서 하와이로 가는 미국 태평양 횡단 기선 갤릭호(S.S.Gaelic)에 탑승인원은 102명으로 1903년 1월 13일 하와이 호놀룰루에 도착하였다. 다시 검역과 입국절차를 마치고 협궤열차에 탑승하여 오아후섬 와이알루아(Waialua)농장 모쿨레이아( Mokuleia)에서 낯선 이민생활을 시작하였다. 미국에서는 매년 1월 13일을 미주 ‘한인의 날’로 법정 공식기념일로 선포하여 기리고 있다.

1905년 하와이에는 약 65개의 농장에 5,000여명의 한인노동자들이 혼합농장에서 다른민족들과 함께 생활했다. 사탕수수농장에서는 십장(什長)인 ‘루나’의 감시를 받으면서 뜨거운 햇볕아래서 힘겨운 중노동의 삶을 견뎌야했다. 그 당시 1905년까지 성인남자의 월급은 17달러였으나 여자와 소년은 하루 50센트로 노동환경이 열악하였다. 그러나 한국인 특유의 ‘은근과 끈기’로 농장의 규칙적인 생활을 견뎌내면서 정착을 하였다. 그후 추가적인 이민자의 유입으로 본격적인 초기한인사회가 형성되었다. 

이런 하와이 이민사의 애환을 다룬 영화가 ‘애니깽(Henequen)’(1996년작)이었다. 애니깽은 용설란(龍舌蘭)의 품목으로 헤네켄(Henequen)의 스페인식 발음인 ‘에네켄’을 한국인 노동자들이 ‘애니깽’으로 사용하면서 붙여진 한국노동자의 별칭이다. 이 영화에서 농장관리인과 감시인들의 학대와 무더위속에서 애니깽들은 고된 노동을 견디지 못하고 인종차별을 감수해야했던 20세기초 한국인의 이민사를 재조명한 작품이기도 하다. 

올해는 미주이민사의 120주년되는 해이다. 물론 공식적 이민의 역사는 구한말의 불안한 정세로 중국 만주와 러시아 연해주로 이주를 했었고, 일제 강점기에는 일본으로 이주도 본격화하여 재일동포사회가 형성되었다. 그리고 1937년 스탈린정권의 한인이주정책으로 우즈베티스탄과 카자흐스탄지역으로 강제이송되면서 중앙아시아로 한인동포사회가 확장되었다. 그리고 건국후 중남미의 농업이민으로 브라질과 파라과이, 볼리비아 등지로도 이민이 이어졌다. 특히 1963년 파독 광부의 첫 노동이주를 시작으로 1966년 파독 간호사의 파견이 이어지면서 재독 한인동포사회가 형성되었다. 제2, 3세들이 정치계와 경제계 및 학계 등 전분야에 걸쳐 왕성한 활동으로 유럽과 독일속에서 한국인의 우수성과 근면성을 빛내고 있다. 

현재 해외한인동포의 인구는 약 750만명으로 추산하고 있다. 세계 각국에서 국위를 선양하고 있는 재외동포에 대한 국가차원의 정책적 지원과 전문적인 관리가 절대적으로 필요한 시대가 되었다. 지난 27일 국회법사위에서 외교부 산하에 ‘재외동포청’을 설치하는 정부조직법 개정안이 통과된 것을 환영한다. 그렇다면 신설된 재외동포청의 유치는 이론의 여지없이 인천광역시가 적임지라고 제안한다. 우선 유정복 인천시장이 적극적이기도 하지만 시정목표가 ‘시민이 행복한 세계 초일류도시 인천’으로서 인천시 7대 주요시책으로 ’4. 재외동포청 인천유치’를 추진해왔다는 점이다. 

지난해 11월 11일 유럽한인총연합회(유제헌 회장)와 양해각서를 체결하여 지지하였고, 우즈베키스탄 고려인연합회도 지지하였다. 그리고 2월 22일에는 하와이 교민들도 재외동포청의 인천유치를 선언하였다. 유정복 시장은 “지금의 우리나라가 있기까지 재외동포의 노력을 빼놓을 수 없는데 그 중심에 이민사의 출발점인 인천이 있다.”고 강조하면서 이민사의 출발지인 재외동포청의 인천유치를 선언했다. 당연한 것이 입지적 조건인데 해외동포들이 인천공항으로 입국과 동시에 편리하게 접근가능한 도시는 인천시가 최적지이다. 국제적 수준의 도시 인프라가 구축되어있고, 서울과도 근거리로 비즈니스에도 적합한 인천시에서 유치하는 것이 지방의 타도시보다 적합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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