뿌리

내 몸 어디를 만져봐도 뿌리가 없다 아니다 내 몸은 뿌리로 엉켜있다 틈새마다

촉수를 뻗어 나를 간섭하는 뿌리, 버팀목을 자처하며 내 밑동이 되려 하는 뿌리,

나는 뿌리의 눈물과 함께 잠들고 뿌리의 뜻에 반反하여 깨어난다 뿌리를 캐낼 수

있는 칼은 지상에 없다 내가 지평을 넓히지 못하는 것은 뿌리를 무시하기 때문,

뿌리를 외면하는 심장은 가뭄을 탄다

 

​뿌리는 뿌리로부터 오고 뿌리로 이어져 간다 뿌리의 실핏줄, 뿌리의 동맥 끝에서

소리 없이 꽃들이 피고 졌다 뿌리 속에 뿌리가 있고 뿌리 바깥에도 뿌리가 있다

갖가지 잎을 틔우고 열매를 맺게 하는 그 근본은 깊고도 질기다 내가 가꾼 숲이

실은 아득한 근원으로부터 온 것이라는 사실, 나를 지탱하는 줄기도 뿌리의 푸른

물길임을 알겠다 꽃이며 물관이며 동시에 뿌리인 나를 본다

 

- 허영둘, 시 ‘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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