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구선생과 인연은···


왜인 살해혐의 감리서 압송···모친 곽낙원 여사 옥바라지


“민국 28년(1946)을 맞이하여 나는 38선 남쪽 지방을 순회하였다. 먼저 내게 의미가 깊은 인천지역을 돌아보았다.”

백범과 인천은 특별한 인연이 있다. 그는 ‘백범일지’에서 해방 후 임시정부 환영회를 전국적으로 열어줄 당시 자신에게 의미가 깊은 ‘인천을 먼저 돌아보았다’고 기록할 정도였다.

백범이 임시정부를 이끌 수 있었던 원동력이 된 곳이 바로 두 차례나 옥살이를 하며 깨우침을 얻었던 ‘인천’이기 때문이다.

1895년, 그의 나이 20살 때 명성황후 시해사건이 일어났다. 백범은 국모를 시해한 원수를 갚고 국가의 치욕을 씻기 위해 치하포 나루에서 일본인을 살해했다. 당시 외국인 관련 사건은 인천 감리서(현 중구 내동)에서 재판을 했기 때문에 백범은 인천으로 압송됐다.

그는 심문을 받으면서 왜인 살해 취지를 분명히 밝히는 한편 군부(君父)의 원수를 갚지 않고 벼슬과 녹봉을 누리며 자신을 재판하고 있는 관리들과 재판에 참석한 일본인까지 크게 나무라는 행동을 보였다. 이 사건으로 백범의 충의와 용기가 만천하에 알려지면서 감옥에서도 특별대접을 받게 됐고, 많은 사람들이 그를 흠모해 면회를 청하고 격려했다.

이때 백범의 모친 곽낙원 여사도 인천으로 함께 올라와 감리서 삼문 밖 물상객주 박영문의 집에서 식모살이를 하면서 아들의 옥바라지를 해 많은 사람들로부터 크게 존경을 받았다.

백범은 이 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지만 사형집행 3일전에 개통된 전화로 고종(高宗)이 직접 특별지시를 내린 덕분에 극적으로 형이 유보되는 곡절도 겪었다. 그는 감옥에 있는 동안 신서적을 보며 신문화에 눈을 뜨게 됐다. 그가 척사위정(斥邪衛正)적인 사상에서 개화사상가로 전환하게 된 것도 인천감옥에서의 독서 때문이라는 것이다.

백범이 수감돼 있는 동안 그를 석방시키기 위한 유지들의 노력이 있었지만 가능성이 보이지 않자, 1898년 3월 그는 감옥을 탈옥해 방랑의 길에 올랐다.

하지만 일본은 안명근의 독립자금 모집 사건을 빌미로 민족주의자들을 잡아들였으며, 백범에게도 15년형을 선고했다. 이렇게 해서 백범이 두 번째로 인천과 관계를 맺는 것도 감옥생활을 통해서다.

서대문 감옥에서 수감생활을 하던 백범은 2년 정도의 형을 남겨두고 1914년 인천감옥으로 이감돼 항만축조공사 등에서 강제 노역을 했다.

백범은 옥고를 치루는 동안 세상으로 나갈 준비를 하며 이름 김구(金龜)를 김구(金九)로 바꾸고, 호 연하(蓮下)를 백범(白凡)으로 바꿨다. 이름을 바꾼 것은 일제의 호적에 들어가지 않겠다는 것이고, 호를 바꾼 것은 ‘우리나라의 하등사회, 곧 백정(白丁) 범부(凡夫)들이라도 애국심이 지금의 나의 정도는 돼야 완전한 독립국민이 되겠다는 소원을 가지자’는 뜻에서였다.

백범이 인천에서 겪은 두 차례의 감옥생활은 그의 사상을 근대적인 개화사상으로 전환시키며 민주적인 역량에 입각한 항일민족주의사상으로 승화시키는 계기가 됐다. 백범이 그 뒤 국내에서 애국계몽운동을 이끌며, 망명 후 27년 동안 끈질기게 임시정부운동을 주도한 것도 인천감옥에서의 깨달음과 단련이 밑거름이 됐기 때문일 것이다.

조자영기자 idjycho@i-today.co.kr

백범 동상 이전계획


역사적 장소찾기 여전히 설왕설래


지난 1997년 10월 인천시 남동구 장수동 인천대공원에 세웠던 백범 김구 선생과 그의 모친 곽낙원 여사의 동상 이전 움직임이 다시 일고 있다.

인천시는 2009 인천세계도시엑스포 이전에 백범 김구 선생의 동상을 역사성을 가지고 있으면서 보다 많은 인천시민들이 접할 수 있는 최적의 장소로 옮길 것을 검토 중이라고 밝혔다.

시와 백범 김구선생기념사업회(회장 김신)가 백범 김구 선생과 모친 곽낙원 여사의 동상을 시민들이 많이 접할 수 있고, 역사성과도 연결 지을 수 있는 공간으로 옮기는데 합의하면서 동상 이전 움직임이 본격화되고 있는 것이다.

현재 인천대공원 내 관모산 등산로 입구에 자리잡고 있는 백범 김구 선생의 동상은 해마다 추모식과 글짓기 대회 등이 열리고 있지만 아직까지도 인천시민들에게 널리 알려져 있지는 못하는 실정이다.

또한 두번이나 투옥당하면서 죽을 고비를 넘긴 백범 김구선생과 인천과의 특별한 인연도 역사적 고증이나 보존 및 발굴작업이 전혀 진행되지 않는 등 구전에 가까운 이야기거리로 전락했다.

따라서 백범 김구 선생의 동상 이전을 통해 다시 한번 백범선생의 정신과 애국애족 정신을 되새기고 철저한 역사적 고증을 통해 인천과의 인연을 다시 잇게끔 하자는 주장에 힘이 실리고 있는 상황이다.

단순한 동상 이전이 아니라 민족지도자 백범선생을 인천의 역사 중 하나로 편입시키는 역사와 문화, 사회를 아우르는 포괄적 의미의 사업이란 것이 시 관계자들의 생각이다.

기념사업회 김신 회장은 지난 27일 안상수 시장을 만나 김구 선생의 친필휘호와 백범일지 영인본을 전달하며 동상 이전 사업에 적극적인 협조를 약속하기도 했다.

그러나 동상 이전이 순탄치 만은 않을 전망이다. 백범 동상 이전 부지를 놓고 시와 사업회, 지역 시민단체와 학계 등의 의견이 제각각이기 때문이다.

백범 기념사업회는 동상을 구월동 문화예술회관 앞 광장으로 이전할 것을 건의했지만 일부 시민단체들은 중구 자유공원의 맥아더 동상을 인천상륙작전기념관으로 옮기고 백범 동상을 세우자는 주장을 하고 있다.

인천지역 향토 사학자들 사이에서는 김구 선생이 투옥돼 있던 옛 인천감리서 자리인 중구 내동 인근이 적정하다는 의견과 자유공원 인근의 언덕에 인천항을 내려다 볼 수 있는 자리가 좋다는 의견도 있다.

시는 2009 도시엑스포와 연계해 추진되는 인천 역사 개발사업의 일환으로 송도국제도시 내 중앙공원으로 옮기는 방안도 검토 중인 것으로 전해졌다.

일부는 향후 인천대공원 주변의 개발계획을 고려해 당장 옮기지 않아도 유입인구가 늘어나는 만큼 지금의 장소도 큰 문제가 없다는 의견도 있다.

시 관계자는 “지역의 여론과 학계, 향토 사학자들까지 동원해서라도 적정한 장소를 찾기 위해 노력할 것”이라며 “백범 김구 선생의 동상 위치는 인천시민들의 접근성과 역사성을 고려해야 한다”고 말했다.

김요한기자 yohan@i-today.co.kr

백범 동상 인천대공원 왜?


97년 민관 건립 뜻 모아 입지는 탁상공론에 매몰


인천 남동구 장수동 산 190번지 인천대공원에는 백범 김구 선생 동상과 우측 후면에 그의 모친 곽낙원여사상이 자리하고 있다. 하지만, 많은 인천시민들은 백범을 추모하는 기념물이 인천에 있는지, 백범이 인천에 어떤 연고가 있는지 알지 못하는 게 사실이다.

백범 김구 선생의 동상이 인천대공원에 건립된 때는 지난 1997년 10월27일. 인천의 많은 인사들이 참여, 기금 5억원을 모은 것은 물론 인천시까지 동상 건립에 힘을 보탰다. 민·관 파트너십이 지금처럼 횡행하던 시기가 아니었던 만큼 뜻 깊은 일이었다.

하지만, 동상이 건립된 지 10년이 지난 오늘날 동상이 들어선 입지 때문에 ‘인천’에서의 백범 기념사업은 취지가 무색하다는 지적이 높다.

1996년 5월 백범기념사업회가 ‘백범김구의 겨레사랑인천전시회’를 개최하면서 백범과 인천에 대한 시민의식이 대두됐고, 이에 따라 동상건립 여론이 확산되기 시작했다.

그해 6월13일 총 12인의 지역원로들이 참여, 발기인회가 발족됐고, 8월8일 백범 김구선생 동상건립추진위원회 결성을 위한 51명의 주비위원회가 구성됐다. 당시 최기선 인천시장이 참석, 행정지원 등 사업에 힘을 보태겠다고 밝혔다.

주비위는 서울대 조형연구소에 조형물 제작을 의뢰하는 것과 동시에 백범기념사업회에 모친상을 함께 넣을지 여부를 논의했다. 11월27일 2차 주비위를 개최, 추진위원 670여 명을 선정하고, 결성대회를 개최하게 된다. 기금 5억원까지 조성되는 등 그야말로 일사천리로 진행된 것이다.

하지만, 백범 김구 동상 입지에 대한 논란이 대두됐다. 당초 공정기간은 1997∼1998년까지 목표로 했고, 월미도 시민공원에 동상을 세우겠다는 안이 제시되면서 추진위원들 사이에 논쟁이 시작됐다.

이와 함께 자유공원, 월미도, 송도 등 입지 타당성에 대한 논쟁이 벌어졌다. 무엇보다 역사성과 시민접근성 등을 입지조건으로 해야 한다는 것이다.

입지 논의는 역사적 검증이나 사회적 합의 등을 외면한 채 탁상공론에만 매몰, 인천대공원에 들어서게 됐다고 전해지고 있다. 추진위 사무국장을 맡았던 박영복 당시 정무부시장은 “추진위가 엄정한 협의 없이 인천대공원으로 장소를 정하는 바람에 이에 대한 항의 차원에서 사무국장을 사직했다”며 “당시 추진위에는 친일파 인사들까지 포함돼 많은 논란이 있었다”고 말했다.

손톱 만한 사례만 있어도 위인 등 역사적 인물을 지역적으로 브랜드화하는 데 능통한 일본의 지자체에 비하면 인천의 백범동상 건립추진위의 성급한 입지 선정은 오히려 백범을 희화화했다는 지적을 피할 수 없게 된 것이다.

김창문기자 asyou218@i-toda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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