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3년 애스컴이 공식 해체될 때까지 부평의 역사에는 미군부대가 ‘상수(常數)’처럼 따라붙는다. 50~60년대 부평은 개항기 인천항 처럼 일자리를 찾아 전국 각 지에서 몰려든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1957년 4만3천여 명이었던 인구는 불과 5년 뒤인 1962년에는 8만7천여 명으로 무려 두 배나 늘었다. 애스컴에서 근무한 이모(82·부평구 갈산동)씨는 “미군부대와 인근 지역은 마치 서부 개척시대의 ‘골드러시’를 방불케 했다”며 “힘이 있다 싶은 사람들에게는 미군부대 취직청탁이 쏟아졌고 취업과 관련된 사기 사건도 많았다”고 회상한다.

60년대 초반 제조업 종사자의 월급이 2만6천∼2만8천환이었던 것에 비해, 애스컴에 고용된 사람은 직급에 따라 3만9천∼4만9천환을 받았다.

‘외기노조 20년사’(1979)에 따르면 애스컴에는 하역작업, 차량정비 등 군사임무는 물론 노무자, 미장공, 벽돌공, 운전사, 정비공 등 기능직과 비서, 타자수, 서기, 은행출납원 등 사무직까지 거의 모든 직종이 있었다. 사람들에게 애스컴은 별천지였고 동경의 대상이었다.

당시 고용된 한국인 노동자의 수는 정확히 집계되지 않지만 적게는 3천명, 많을 때는 9천명까지 있었다고 전해진다. 정영태 인하대학교 정치외교학과 교수는 “1960년대 중반 부평공단이 조성될 때까지 부평의 지역경제는 미국의 원조와 미군부대가 제공하는 일자리에 크게 의존하면서 지역경제와 주민생계를 지탱하고 있었다”고 말했다.

애스컴에 근무하는 근로자들은 1959년 노동조합을 결성, 임금인상 등 노동자 처우개선을 요구하기도 했다. 당시만해도 획기적인 일이었다.

“‘일을 할 수 있을까’라는 기대심리로 부대 앞에서 서성이면 미군이 나와서 눈에 드는 사람을 뽑았고, 마음에 들지 않으면 가차없이 해고통보가 왔습니다.”

애스컴지구 미군종업원노동조합은 1961년 2월 인천시 의회에 청원서를 제출하기도 했다. 한미행정협정이 체결되지 않아 미군부대 내 한국인 종업원의 문제를 미군과 정부당국에만 맡겨놓았을 뿐, 시는 수수방관하고 있다는 것이다. 또 궐기대회를 개최해 가두시위도 별이는가 하면, 파업가부 조합원총투표를 실시해 미군을 압박하기까지 했다.

부평의 상권도 애스컴을 중심으로 형성됐다. 부평시장(현 문화의 거리) 뒷쪽에는 ‘양키시장’이 형성돼 애스컴에서 흘러나온 각종 생활물품들이 판매됐고, 신촌(부평3동)에는 미군들을 상대로 이자놀이하는 대부업, 전당포, 클럽 등이 부지기수로 들어섰다.

또 부대 인근에서 소위 ‘양공주’로 돈벌이를 영위하는 여성들도 적지 않았다. 잘나가는 양공주는 명품화장품이나 옷 등을 걸쳤고, 고가의 일제 자전거도 타고 다녔다고 한다. 60년대 중반에는 양공주 이모(22)씨가 미군의 학대를 못이겨 자살하는 사건이 발생, 동료 양공주 1천여 명이 이씨의 상여를 들고 항의시위를 벌이기도 했다.

미군부대는 부평 역사에서 딜레마일 수밖에 없다. 부평의 황금기로 기록되기도 하지만 걸림돌이라는 인식도 상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문제를 어떤 방식으로 극복해야 부평이라는 도시가 갖고 있는 정체성을 규명할 수 있는지 과제로 떠올랐다. 반환부지 활용에 대한 갑론을박은 무성하지만 현재 이같은 '성찰'은 들어갈 여지가 없는 상태다.

정영태 교수는 “미군부대로 인해 경제활성화는 이룰 수 있었지만, 실질적 혜택을 받은 사람은 극소수에 불과했다”며 “미군부대가 공공적 관점에서 활용될 수 있도록 심도있는 논의가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는 또 “아직까지 부평미군부대의 역사나 실체 등이 미지수로 많이 남아 있기 때문에 이에 대한 연구가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김창문기자 asyou218@i-today.co.kr

저작권자 © 인천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