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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의 하천을 찾아서-(9)승기천 발원지와 물길
인천시 남동구 구월동 농산물시장에서 시작하는 승기천의 발원지는 과연 어딜까? 선뜻 답을 내릴 수 있는 이들은 그리 많지 않을 듯하다. 이에 대한 고증 자료들이 없는 탓이다.

남공공단과 연수지구 사이를 타고 흐르는 승기천(承基川)은 ‘승기리’라는 마을 때문에 얻은 이름이다. 승기리는 지금 남구 관교동의 북동쪽 마을로 ‘신비마을’로 불린다.

이 마을의 이름은 한 때 없어져 폐허가 되었다가 다시 생겼다는 뜻에서 유래했다. ‘다시 이어서(承) 생긴 마을(基)’이라는 것이다. 하지만 이는 제대로 고증되지 않은 내용이라는 평가도 만만치 않다.

논리적 타당성도 그리 크지 않다는 게 일부 전문가의 얘기다. 승기천이라는 이름은 옛 서적에 나와 있지도 않는다. ‘삼국사기’나 ‘고려사’, ‘동국여지승람’은 물론이고 ‘대동여지도’에조차 언급되지 않았다. 따라서 세월을 거치면서 누군가가 만들어 낸 명칭으로 풀이하고 있다.

그 동안 승기천의 발원지에 대해선 여러 설이 있어 왔다. 주안동과 용현동이라는 주장이 그 하나다. 또 다른 하나는 지금 수봉산 남서쪽 해발 60여m쯤 되는 기슭이라는 주장이다. 하지만 지금 발원지로 추정되는 곳들 모두 주택가로 변했기 때문에 정확한 지점이나 사실여부를 확인할 길이 없는 형편이다.

승기천의 발원지는 승기산으로 이해하는 이들도 있다. 인천도호부청사와 향교가 있는 산을 말한다. 이 때문에 승기천의 이름이 생겨났다고 하는 이들도 있다. 문학산성과 인천도호부가 있는 관교동 뒤쪽, 즉 ‘산성뒤천’이었다가 이것이 ‘승지천’으로 다시 ‘승기천’으로 발음이 바뀌어 온 것으로 보는 이들도 있다.

여하튼 승기천의 원래 물줄기는 관교동을 지나 남촌동을 거쳐 논현동 앞 바다로 흘러들었다. 하지만 상류 쪽은 모두 없어져 버렸고, 구불구불하던 내(川)의 모습은 똑바로 잡은 직강하 공사로 유로(流露)가 전혀 새롭게 바뀌었다. 이제는 남공공단과 연수지구 사이를 거쳐 동춘동 동막 마을 쪽 바다로 빠지고 있다.

구한 말 선학동 뒤편 지금 문학경기장 인근 제2경인고속도로 고가가 지나가는 곳까지 바닷물이 들어왔다. 연수구 옥련동은 말할 것 없이 연수동, 청학동, 선학동까지 ‘먼우금’이라했다.

한자로는 원우금(遠又今) 또는 원우이(遠又爾)라 했다. 걸어서 가려면 한참을 멀리(遠)돌아서 가야했지만(又), 배로 건너면 가깝다(爾)는 뜻이었다. 먼우금면이었던 이곳은 조선시대에 남동구 조동면(鳥洞面)을 사이에 두고 갯골이 길게 뻗어 있었다.

남촌동은 1988년 전까지 남구 선학동에 속한 마을이었다. 이후 남동구 도림동으로 편입됐다가 1991년 다시 도림동에서 떨어져 나왔다. 남촌동은 인천도호부청사가 자리한 문학산 남쪽에 있는 마을이라서 붙은 이름이다. 지금은 남동공단과 택지로 변했지만 구한말까지 ‘염말’이라고 불렀던 곳이다. 바닷물을 끓여 소금을 만드는 자염밭이 많았기 때문에 붙은 이름이었다.

논현동의 옛 이름은 논고개로 구한말까지 인천부 남촌면에 속해 있던 마을이었다.1903년 인천부가 동네이름을 확정할 때 논고개 마을과 모래마을이 있다 해서 논현리 사리동(沙里洞)이 됐다가 1906년 논현동이 됐다.

분명한 사실은 승기천의 원래 물줄기가 지금과 확연히 달라졌고, 과거 승기천의 물이 흘렀던 곳은 선학동~남촌동~논현동 등 갯마을 언저리 갯골이라는 것이다.

박정환기자 hi21@i-today.co.kr




1985년전까지 이름도 없었던 하천


일제때 지명 '승기리'와 연관 이름지워진 듯


영일 정씨 집안이 터를 잡은 뒤 14대째 살아오고 있는 인천시 연수구 동춘동 동막의 정구헌(57)씨는 ‘승기천’이라는 이름에 머리부터 긁적였다. ‘승기천’이라 함은 분명 하천(川)을 말할진대, 위치며 생김새며 머릿속에서 딱히 떠오르지 않는 것이었다.

“저기 배래터(배를 대는 곳) 근처를 지나는 그 냇갈 말하는 거여?” 구헌씨가 짚은 배래터는 남동구 수산동을 가리키는 것이었고, 그 ‘냇갈’은 수도권해양생태공원 갯골을 따라 흐르는 장·만수천을 얘기하는 것이었다.

“아니 그게 아니고~ 형님, 그 왜 구월동 농산물도매시장에서 남동공단 유수지로 흐르는 개울 있지? 그 얘기를 하는 거야!” 바로 옆에 있던 조재구(49·인천시 남동구 고잔동)씨는 장·만수천을 자꾸 떠올리는 구헌씨가 답답한지 말을 거들었다. 구헌씨와 재구씨는 논현초등학교 동문으로 선·후배간이다.

재구씨의 말에 감을 잡은 구헌씨는 이내 말을 내뱉었다. “야~ 임 마! 그게 무슨 하천이었냐? 갯고랑이었지, 그리고 지금이야 무슨 하천으로 부르지만 그때야 어디 이름이나 있었던 개천이었냐?”

구헌씨가 머릿속에서 어림짐작으로 그린 승기천의 예전 모습은 장·만수천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염전 사이로 난 갯고랑을 따라 흐르는 개울, 바로 그것이었다. 사실 승기천은 이름이 지어진지 얼마 안 되는 하천이다. 그 이름의 출처도 그리 딱 떨어지는 것도 아니다.

1910년대 인천(당시 인천부)의 지도에는 인천시 남구 관교동(당시 관청리) 인천도호부청사가 있는 곳에서 북동쪽으로 ‘승기리’(承基里)라는 작은 마을이 있었다. 지금의 신비마을 자리이다. 따지고 보면 승기리라는 이름도 오래 전부터 내려오는 마을이 아니었던 것으로 보인다.

당시 지도를 아무리 꼼꼼히 살펴봐도 승기리의 이름을 땄다는 승기천은 찾을 길이 없다. 승기리에서 야트막한 야산을 지나 주안의 석암리(石岩里·지금의 석바위)로 이르는 고갯길이 있고, 그 주변에는 간간히 논만이 읽힐 뿐이다. 그리 큰 개울이 없었거나 있어도 하천의 역할을 하는 내(川)가 아니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다만 당시 지도에서 지금의 주안의 신기촌 일대일 것으로 추측되는 사충리(士忠里) 부근에서 하나의 물줄기가 잡힌다. 이 물줄기는 지금의 동양장 사거리 근방 쪽으로 흐르다가 방향을 틀어 종합문화예술회관 근방을 거쳐 농산물도매시장과 남동경찰서 앞을 지난다. 이어 선학동 언저리를 비스듬히 타고 남촌동에서 논현동을 거쳐 바다로 빠져나가는 것으로 모습을 하고 있다.

이 물줄기는 선학동에 닿기까지 논 사이를 지나고 있는 모습이다.그렇다면 승기천이 승기마을 인근인 승학산이나 승기산에서 발원하는 개울이라는 것은 지도를 통해 볼 때 들어맞지 않는 얘기일 수 있다.

“아마 지금 ‘승기천’은 갯골로 이어지는 조그마한 내였고, 그 물길도 워낙 작아 장마가 지지 않으면 흐르는 물이 거의 없는 건천(乾川)이었지…” 구헌씨가 기억하고 있는 승기천은 적어도 1985년 전까지 ‘이름 없는 하천’이었다. 그 해 남동공단이 조성되면서 물길이 새로 곧게 펴지고 하천 폭도 넓혀져 지금과 사뭇 다른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이 승기천이다.

박정환기자 hi21@i-today.co.kr




90년전 하류는 갯골의 모습···지금은 아파트 단지로 변보


지금이야 아파트 단지지만 90여 년 전의 승기천은 흡사 송도갯벌의 갯골 모습이었다. 지금 남동공단 유수지 인근 ‘큰 골’에서 시작되는 갯골은 북쪽으로 올라가면서 크게 네 갈래로 갈라졌다. `큰 골'은 지금 남동유수지 배수 펌프장 자리로 배를 대는 선착장이었다.

그 한 줄기는 동춘동 동막과 남동공단 제1근린공원인 부수지 사이를 거쳐 저수지에 닿았다. 동막(東幕)이라는 마을 이름은 논에 물을 대기 위해 둑을 막는다는 뜻인 동막이 한다라는 말에서 유래했다.

또 하나는 사라진 대원예도(大遠禮島)와 소원예도(小遠禮島)의 왼쪽을 돌아 연수동 쪽으로 틀어진 갯골이었다. 여기에 지금 논현주공 아파트가 들어선 사리동(沙里洞)의 범아가리곶(虎口浦)을 돌아 선학동인 도장리(道章里)에 닿는 갯골이 갈라져 있었다. 여기서 떨어져 나와 지금의 남촌동인 와우리(臥牛里)에서 남동경찰서 인근까지 다다르는 곁가지 골이 또 나 있었다.

마지막 갯골은 논현 포대와 지금의 고잔동인 갈산동(葛山洞)중간의 만에 이르는 갯골이었다. 1910년대 남동갯벌 여기저기 널려 있던 개울들이 갯골을 따라 흘러드는 형국이었다.

갯골이 닿는 동네 언저리에는 논농사에 필요한 물을 대기 위한 방죽들이 조성돼 있었다. 그 때만 해도 논농사는 비가 내려야 농사에 필요한 물을 얻을 수 있는 터라 방죽과 둠벙은 긴요한 시설 중 하나였다.

남촌동에는 국장내방죽이, 도림동에는 큰방죽과 개미방죽이, 논현동에 동녘방죽과 가오산방죽, 괴하방죽 등이 자리했다. 고잔동에도 갈산이라는 방죽이 있었다.

박정환기자  hi21@i-toda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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