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섯살때 한학을 시작. 열여덟에 대한민국서예대전 도전, 7전8기 끝에 입선, 이후 연이어 6년을 수상하면서 특선으로 마무리. 20대 초반부터 후학을 지도하기 시작.

월간서예 미술문화원이 주최한 서예대전에서 한문 5체 전 부문 1위 석권. 30대들어 중국으로 유학, 중국 최고의 서법학교로 꼽히는 서안서학원에 입교, 종명선(鍾明善) 현 중국서법가협회 부주석에게 사사. 서예협회 인천시지부 창립 멤버로 가세, 몇년후 서협 인천시지부장으로 추대.

인천의 서단을 이끌고 있는 있는 서예가 봉강(峯?) 최규천 선생의 이력이다. 통정대부 당상관을 지낸 증조부·외증조부의 가르침으로 양반가 종손답게 한학으로 글을 깨우친 그다. 연필 대신 붓 잡는 법부터 배웠다.

약관(弱冠)의 나이에 인천으로 와 오롯이 서예 외길인생을 걸어온 지 올해로 31년째다. 대가는 ‘몽당붓 한자루 쥐고 사는 소생’이라고 한없이 몸을 낮춘다.

▲일찍이 한학을 시작하다

전북 김제 양반가의 종손에게 한학은 숙명 그 자체였다. 증조부는 어린 손자에게 내림글을 원했다. 학교에 들어가기 전부터 구학을 읽었다. 초등학교 시설 내내 댕기머리로 다녔다. 중학교에 가면서 겨우 신학공부에 대한 집안의 허락이 떨어졌다.

“국어보다 한학이 익숙했습니다. 붓글씨를 쓰는 것은 부수적인 것이지요. 할아버님과 부모님이 공을 많이 들이셨어요. 그것이 나로 하여금 평생 붓을 잡도록 한 힘이지요.”

대한민국서예대전에 참가할 수 있는 나이가 되길 기다렸다. 18세가 되자마자 도전을 했는데 결과는 낙방이었다. “이루고야 말겠다는 신념으로 해마다 작품을 냈습니다. 일곱번 떨어진 끝에 이름을 올렸지요.”

한학의 깊이를 더해준 스승이 한분 계시다고 말한다. 그가 운영하는 서예학원 ‘정도제’(靜道齊)에 어느날 팔순 노인 한분이 찾아왔다. 한학을 논하는 옹의 학문 깊이가 끝없이 넓고 깊었다.

“내 생전 그렇게 박학하신 분을 만난 적이 없습니다. 가히 대식학 그 자체였어요. 4년동안 저를 깨우쳐주고 학문에 대한 깊이를 더해주셨습니다. 삼중(三中)이라는 호를 가지셨지요. 제가 그분께 사사했다는 이야기를 감히 꺼내는 것조차 누가 될까 꺼려집니다.” 서예가 이전에 한학자인 그다.

▲서예협회 인천지부를 이끌다

호남 청년이 인천에 온 것은 직업인으로 사회에 첫발을 내딛으면서다. 전북기계국립공고 출신인 그를 인천의 대우중공업이 반겼다.
삶의 중심은 여전히 한학과 서예였다. “직장에 다니며 글씨를 쓰려하니 정진이 안됐습니다. 몇 년을 다니다 그만두었지요.”

일찍이 서예학원을 차렸다. 대우노조차원에서 취미생활로 서예반을 개설하면서 그에게 교습을 맡긴 것이 출발이었다. 스물을 갓 넘은 나이였다.

“20대 새파란 학원장을 원로 서예가들은 많이 총애하셨어요. 그 분들의 큰 사랑이 나로 하여금 인천 서단을 떠나지 못하도록 잡은 것이지요. ”

해마다 국전에서 수상, 국전작가로 확실히 이름을 올린다. 월간서예가 주최하는 서예대전에서는 한문5체 전 부문 1위에 등극하면서 서단을 깜짝 놀라게 만들기도 했다.

공부에 대한 목마름이 늘 가시지 않았다. 한학의 본고장 중국 유학을 결심한다. ‘큰 공부를 하려면 서안으로 가야 한다. 떠나자.’ 중국서법의 대가로 꼽히는 종명선 선생을 찾아갔다. 서안서학원에 입교, 제자가 된다. “글씨를 처음부터 다시 배웠습니다.” 꼬박 6년을 쏟고 돌아온다.

89년 중앙에서 한국서예협회가 결성되면서 인천시지부도 창립했다. “첫번째 스승이 심우식 선생입니다. 부르시더니 인천지부를 도우라고 하셨어요.” 스승의 말에 따라 창립멤버로 발을 들여놓았다.

지부장으로 인천서협을 이끌어온 지 어느새 꽉찬 5년이 됐다. 줄곧 힘을 쏟은 것이 지역서단의 대화합이다. 인천미협 서예분과 문을 두드렸다. 그 결실이 두 협회가 한자리에서 작품을 교류하는 ‘선예술동행전’이다.

“미협내 서예가들이 나와서 서협을 만들면서 두 단체간 골이 갈수록 깊어졌습니다. 더 이상은 안된다. 우리 대에서는 골을 없애야 한다는 사명감이 들었지요. 미협도 이를 기꺼이 받아들였습니다.” 지난 5월 세번째 행사를 치렀다.

또 다른 노력이 있다. 서협이 주최하는 서예대전 심사위원을 다른 단체에서 위촉했다. 각종 대회마다 그들만의 축제에 머무른 채 키운 제자만을 뽑으려는 세태에 신선함을 던져주기에 충분한 시도다. “협회를 끌어가는 제1의 지향점이 열린 서단입니다. 내가 먼저 빗장을 열어야지요.”

▲“참된 나를 찾는 것”

소강 부달선 선생을 가장 존경한다고 말한다. “서예가이자 한학자이십니다. 한문의 깊이가 엄청나지요.”

글씨를 잘 쓰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안에 담긴 뜻을 알고 따라가야 한다고 재차 강조한다. “글을 하는 것은 최고가 되기 위해 남과 경쟁하려는 것이 아니라 내 자신을 발견하는 것입니다. 진정한 정진의 자세로 ‘참 나’를 찾으려는 수행의 다름아닙니다.”

아쉬움을 하나 지니고 살고 있다고 던진다. 기라성같은 인천출신 대가들의 깊은 예술세계를 접할 수 있는 서예관 한 곳 없는 현실이 너무나 안타깝기만한 그다.

“동정 박세림 선생의 유품들이 몽땅 대전으로 가있는 것이 우리의 현주소입니다. 작은 도시에 가도 그 지역 출신 인물을 기리는 기념관을 다투어 건립하고 있는데 반해 인천은 멀어도 한참이나 멀었어요. 관의 적극적인 의지가 아쉽습니다.” 서예관 건립이야말로 중차대한 일이라고 다시 한번 못박는다.

글·사진=김경수기자 ks@i-toda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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