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강한 문화생태계를 육성한다’
양원모 경기문화재단 북부사무소장이 3년전 재단에 와 문예진흥팀장을 맡으면서 몇날 숙고 끝에 잡은 문화예술정책 아젠다다.

“다양한 예술가가 모두 주인공이자 주체로 활동하는 생태계입니다. 그러려면 우선 지역 곳곳에 그들의 활동공간 ‘태실’이 있어야 합니다. 태실 산출을 위해선 예술인들이 모여있는 창작촌이 많아야 하죠. 결국 문화예술 주체와 공간을 만들어내고 그들이 정체성을 발현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일이 문화재단의 역할입니다.”

그가 제도권으로 들어와 문화정책을 수행한 것이 2003년 봄. 그 이전 20여년을 현장속에서 예술과 문화, 교육을 실천하며 살았다. 청년시절부터 그의 삶은 민중예술운동으로 점철됐다.

그에게 인천은 특별하다. 노동문화예술운동의 싹을 심고 틔운 장본인이기 때문이다. 스스로를 ‘무에서 유를 일궈낸 경험이 있는 세대’라고 말한다.

▲경기문화재단과 인연을 맺다

“경기문화재단에 들어올 수 있었던 것은 전문경력을 학위 못지않게 중요시하는 재단의 인력기용방식에 의해서였습니다. 입사 당시 문화예술 경력을 22년 인정받았습니다. 문예진흥팀장으로 발탁됐지요.”

지역문화를 파악하기 위해 사람만나는 일부터 시작했다. 작정하고 6개월동안 고리고리마다 찾아다니며 사람을 사귀었다. 예술가는 물론이고 학자와 성직자, NGO까지 인간적인 유대를 쌓아갔다. 이유는 단 하나다. 유대가 쌓여야 상호 소통이 이루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재단사업중 문화예술진흥기금 지원에 대한 전반적인 재편에 나선다. 목표를 수혜대상 확대에 두었다. “예술인에 한해 지원하는 틀을 깨고 문화 동아리까지 도민 누구나 지원받을 수 있도록 영역을 세분화했습니다.”

기초예술영역을 열고, 공부하는 예술가 모임, 교육활동에 주력하는 모임, 소수자 영역 등을 더해나갔다.

“그많던 문학동인과 미술동인은 왜 없어지는가. 극단은 지속적인 지원에도 불구하고 왜 항상 허덕이는가. 얻은 결론은 대상에 대한 집중지원이 아니라 수적으로 여러 예술동인을 지원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한편으로는 심의제도를 개선했다.
제 1원칙이 공개심사다. 심사위원을 공개하고 심사시 대상자와 면담·토론방식을 수용한다.

심사위원 구성에도 원칙이 필요했다. 비평가와 아마추어 파트를 함께 넣는다. “작품의 질적평가를 위해선 비평가가 필요합니다. 동시에 교육적인 가치도 중요하지요. 교육영역에서 활동하는 아마추어 일군을 위원으로 들였습니다.”

심사의 공정성을 위해 심사평을 공개했다. 지원대상에서 제외된 이유를 당사자가 공감할 수 있도록 가능한 세말하게 수록한 평가서를 냈다.

예서 그치지 않는다. 지원받은 작품에 대한 객관적 평가와 사후 반영을 위한 시스템을 일궈나간다. 도내 31개 시·군에서 예술활동을 하는 시민들을 중심으로 모니터링단을 구성했다. 더불어 젊은 비평가 그룹 40여명을 모아 작품평을 쓰게 한다. 이 글을 담은 보고서가 다음해 심사때 평가 기초가 된다.

“환류구조를 만드는 겁니다. 이제는 심사위원이나 문화예술인 당사자, 향유자 시민 모두 팀의 영략과 성향을 꾀차게 됐죠.”

지난해 2월 재단 북부사무소장으로 자리를 옮기면서 먼저 한 일이란 역시 사람 사귀기였다. 건강한 문화생태계를 조성하기 위한 주인공들을 찾아야 했기 때문이다.

유독 문화재급 예인들이 많은 것을 발견한다. 반면 차세대 육성 고리인 예술대학은 충분하지 않았다. 청소년 동아리육성에 적극 나선다. 방향은 학교안 정통예술 동아리 집중 지원이다.

다른쪽으로는 젊은 작가를 대상으로 창작과 연구, 교육활동을 망라해 지원했다.

올들어 벌이고 있는 연구사업은 또랑광대를 찾는 일이다. “전국에서 판을 벌이던 한광대와 달리 지역 골목골목에서 자기영역을 구축해간 이들이지요. 예술에 대한 개념을 이해하기 위해 이들을 찾아야 합니다.” 이는 곳 ‘태실’을 만들기 위한 전제작업이라고 말한다.

▲인천 노동예술운동 씨앗을 틔우다

소극장 ‘애오개’부터 이야기를 푼다. 81년 서울 아현동지역에서 학생운동권 출신들이 모여 노동예술운동을 일으켜보자는 취지로 연 소극장이다. 그후 놀이패 ‘한두레’, 미술동인 ‘두렁’, 소리패 ‘새벽’ 등 80년대 문화예술동인집단이 이곳을 통해 만들어진다.

그는 ‘한두레’ 멤버이자 ‘두렁’의 창단멤버로 84년 애오개와 인연을 맺었다.

당시 노동운동의 메카였던 인천으로 갈 것을 제안한다. 노동예술을 지향하는 예술가로서 인천이야말로 가야할 땅이라는 판단에서였다.

86년 그를 주축으로 애오개 멤버 10여명이 노동예술을 하기 위해 인천으로 이전한다. 노동현장에 들어가 동아리를 만들고 성당을 빌려 노동자 문화야학을 했다. 때론 노동만화로 촌극을 꾸미고 걸개그림을 내건 잔치마당도 폈다.

“예술을 통한 노동자 문화교육입니다. 요즘 시민대상 문화예술교육의 시발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공간이 필요했다. 우선 풍물패 ‘한광대’를 꾸렸다. 풍물과 대동놀이를 지도하고 대우자동차 사원연수교육까지 맡으면서 자금을 모았다.

드디어 주안역 부근에서 문화예술교육공간 ‘쑥골마루’를 연다. “제2의 ‘애오개’를 탄생시킨 겁니다. 이어 지역내 동인들을 찾아나섰죠. 예술인들은 모여야 창작시너지 효과가 나거든요. 미술패 ‘갯꽃’, 노래패 ‘산하’, 상담기구 ‘일손나눔’이 쏙골마루로 왔습니다.”

이들이 모여 1년뒤 ‘우리문화사랑회’를 만든다. 고문겸 지도고문으로 호인수 주안5동성당 주임신부와 최원식 인하대 교수를 모셨다. 본인은 사무국장을 맡았다.

1년후 인천민중문화운동연합(인문연)으로 이름을 바꾼다. 뒤이어 민족예술인총연합회가 탄생하게 된다.

▲일찌감치 노동예술 중요성을 깨닫다

그의 바탕에는 탈춤이 있다. 대학에 들어가자마자 학교밖에서 카톨릭탈춤반과 기독교탈춤반을 만들어 활동했다.

선배들을 따라 인천 학익동 YH, 원풍모방 등 노동조합에 들어가 탈춤을 가르쳤다. “일찍부터 노동예술운동의 중요성을 깨달았습니다.”

이듬해 대학마다 탈춤동아리가 생겨나면서 학내 동아리로 들어갔다. 전국 대학 탈춤동아리에서 탈춤을 가르키는 일이 그에게 주어졌다.

“탈패가 역사속에서 무엇을 하는지, 그들의 정신이 무엇인지 이야기하기 위해 문학과 연극과 역사서를 두루 통독했어요. 점차 민중예술의 정수가 다가왔습니다.”

▲민중예술운동에서 문화예술교육까지

80년대를 넘기면서 그는 서울로 귀환한다. 민족예술인총연합회 창립을 준비하기 위해서였다.

곧이어 후배 비평가들을 모아 최초의 문화종합지를 표방하며 월간 ‘예감’을 창간한다. 한편으로는 민족미술인협회에 적을 두고 미술평론가로 활동했다. 또 갤러리 운영위원을 하며 글쓰기를 한다.

그러다 덜컥 병을 얻어 쓰러진다. “4년을 안양에서 요양했습니다. 이 기간 본격적으로 글을 썼죠. 노동문화운동의 궤적을 엮는 작업을 했습니다.”

생활고는 늘 따라다녔다. 최소한의 살길이 보장된 문화예술운동이 필요했다. 궁리끝에 다다른 것이 의료와 교육과 창작활동이 결합된 교육문화원이었다.

“후배들이 모여 종자돈을 출자했습니다. 서울 방배동에 ‘초암교육문화원’을 열었죠. 한편에서는 진료비가 싼 한의원을 열어 운영비를 충당했습니다. 교육쪽은 어린이 독서·논술지도, 교육예술문화학교, 교사양성 과정을 개설했습니다. 한쪽은 기획·창작파트를 맡아 자유콘서트 등을 만들었죠.”

이중 어린이 교육을 담당했던 팀이 몇년후 청소년 대안학교 ‘하자센터’로 들어간다.

“늘 목말랐던 것이 공간이었습니다. 태실만들기에 유독 집착하는 이유죠. 이를 위해 교육이 중요합니다. 한가지 더해 예술가는 모여있어야 파편화되지 않고 힘이 생깁니다. 인천의 많은 예술인들이 강화도에 모이는 것은 바람직한 현상이에요. 그곳에 예술인마을이 하나쯤 만들어지는 것이 중요합니다.” 마무리는 인천에 대한 애정이다.

김경수기자 ks@i-toda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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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원모는…

▲1958년 강원도 상동 출생 ▲1978년 홍익대 사범대 외국어교육학과 입학 ▲1985년 민족미술협의회 정책실장 ▲1986년 주안 문화공간 ‘쑥골마루’ 개관, ‘인천우리문화 사랑회’ 초대 사무국장 ▲1987년 인천 민중문화운동연합 지도위원 ▲1989년 민족예술인총연합 창립 주비위원 ▲1990년 문예대중지 월간 ‘예감’ 편집인 ▲1994년 2월 안성 농민병원 설립을 위한 문예한마당 ‘활생예술제’ 기획·연출 ▲1994년 8월 홍익대 졸업 ▲1995년 ‘인천 시민포럼’ 문화국장 ▲1996년 민족예술인총연합 문화사업단 부단장 ▲1999년 6월 ‘초암교육문화원’ 원장 ▲2000년 강화 ‘생명축제’ 기획 추진위원 ▲2001년 11월 초암교육예술연구소 개설 ▲2003년 4월~2005년 1월 경기문화재단 문예진흥팀장 ▲2005년 2월 경기문화재단 북부사무소장 부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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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주에 만날 사람/만화가 장진영

내가 아는 장진영은…

청년시절 생활속에서 역동적으로 행동하는 살아있는 미술을 일으키자라는 데 의기투합, 민족미술배우기부터 민중미술을 일궈나가는 일을 함께 했던 이다. 처음 세운 뜻을 여전히 일궈가고 있다. 웃음이 많고, 덕이 있고, 넉넉한 심성을 지녔다. 힘들 때마다 궂은 일을 솔선해하던 그의 모습이 마음에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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