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르릉!”

“담당입니다. 네엣! 20억 원이나요?”

졸지에 4억 원의 프로젝트가 24억 원의 프로젝트로 둔갑하는 순간이었다. 청량산 서면 경사가 심한 산비탈에 소규모의 전쟁과 관련된 전시장을 기획하고서 설계자를 정하여 추진되던 중 애초에 책정된 공사비가 턱없이 부족하단 결론에 이르러 애를 태우고 있던 참이었다.

인천시가 확보한 4억 원으로는 도저히 감당키 어려운 24억 원의 공사비가 너무 싱겁게 마련된 것이다. 경기도지사가 지원금을 내려주기로 한 것. 도대체 KSG가 누구야?




(▲김수근의 인천상륙작전기념관 초기 개념 드로잉<왼쪽>. 인천상륙작전기념관 전경 /사진제공=한국자유총연맹 인천지부)

전영춘 인천시장(1980.5~1981.6)의 재임 말기. 세상은 전두환 군사정권의 시퍼런 군화발 아래 설설 기고 있었다. 다른 건 몰라도 군사문화 관련 과업에 쏟아 붓는 돈은 이유 여하를 막론하고 효잣돈이 아닐 수 없었다. 18대 경기도지사 염보현(1980.9~1983.10 재임)의 막후 지원을 이끌어낸 장본인은 바로 건축가 KSG였다.

애당초 이 전시장의 설계가 공개경쟁에 의한 것이 아니고 설계자를 지목하여 수의계약에 의해 추진될 때부터 냄새가 난다싶었던 담당은 차라리 잘 되었다 싶었다. 과업의 목표는 6.25전쟁 당시 맥아더가 이끄는 연합군의 인천상륙작전을 기념하는 전시장을 세우는 것이었다.

500여 평의 전시장 규모에 탱크, 전투기, 군함 등 실물을 배치한다는 외부공간 프로그램과 멀티 프로젝션을 이용한 당시 최고의 전시기법을 동원하여 영상 프로그램의 차별화를 두겠다는 설계자의 의지 등으로 말미암아 전체 건축공사비가 대폭 추가된 것이다.

KSG는 인천상륙작전기념관의 작업을 통하여 여러 점의 드로잉을 남겼다. 그는 평생 수백 여 건물을 설계했지만 그가 드로잉으로 프로젝트에 관심을 보인 것은 그렇게 많은 수가 아니다.

비슷한 시기, 마산의 양덕성당과 경동교회에 대한 KSG의 드로잉이 다수 남아 있는데 이는 그가 프로젝트에 보인 정성의 깊이 정도로 이해해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양덕성당과 경동교회는 그가 설계한 불후의 명작으로 손꼽힌다.

1980년대 초반의 KSG는 건축절정기를 치닫고 있었다. 박정희 군사정권의 비호아래 시작된 1961년 이래 그의 건축세계는 도시와 건축 전반에 걸쳐 다수의 프로젝트를 양산한 상태였다. 그는 정부가 출연한 공기업인 한국종합기술개발공사의 사장으로 재직하기도 한다.

그 시절에 세운상가로 대변되는 남산과 종묘를 연결하는 가공할 스케일의 인공도시축을 만든 것도 그였다. 정황이 이러하니 정권과의 밀착된 행보로 말미암아 그의 건축세계의 진정성을 의문하는 이들이 오늘날 여기저기서 쌍심지를 치켜들고 있는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그만큼 KSG의 주변은 단단한 지배 권력의 네트워크로 무장되어 있었다.

KSG는 청량산의 중턱에 위치한 대지에 건물의 실루엣을 그려나갔다. 일필휘지. 한국의 건축가들 중에서 최고의 필력이라고 해도 지나치지 않을 그의 첫 드로잉은 훗날 완공된 건물과 전혀 다른 이미지 컷이 그려져 있었다.

산중턱에 조심스레 놓은 목반(木盤)의 이미지. 그러나 그 같은 이미지로서는 군사정권의 공간정치학을 만족시킬 수 없었을 것이다. 건축가의 고민이 그 안에서 맴을 돈다.

“정 실장, 어떻게 되 가고 있어?”

공간사옥 5층에 마련된 그의 서재 장짓문이 열리면서 KSG의 불같은 호령이 들려왔다. 공허부(보이드)에 잔뜩 긴장감이 휘돌았다. 방금 KSG는 외국여행을 마치고 돌아온 것이다.

급경사지에 건물을 앉히기 위해 구축된 성벽의 현장 스케일이 300분의 1 축척의 도면에서 보던 것과 크게 벌어져 그것의 차이를 극복하기 위해 수없이 많은 상세도면을 그려대느라 퇴근도 못한 채 정신이 쏙 빠져있던 정 실장의 머리 위로 날선 음성이 메아리가 되어 돌아왔다. 시계의 분침은 자정을 넘어가고 있었다. <계속>
글: 전진삼(건축비평가)

▲등장인물
KSG(실명 김수근)=1931년생. 김중업 선생과 함께 한국현대건축의 태두로 불린다. 공간사옥, 서울하계올림픽주경기장, 경동교회. 한계령휴게소, 진주박물관, 샘터사옥 등 한국건축사에 길이 남는 작품의 설계자이다.

1960년 남산국회의사당의 당선자 중 한 사람으로 일본 유학을 마치고 금의환향 하였으나 그 프로젝트가 무산되면서 반짝 스타로 남는가 싶었는데 청년 건축가의 화려한 등장을 지켜본 당시 박정희 군부세력의 비호 아래 도시설계와 기념비적 건축을 완성시키며 문화 권력의 중심에 입지한다.

그러나 그의 진면목은 1966년 11월 종합예술지 ‘공간’을 창간하며 한국전통문화를 발굴 전파하고 세계 현대건축과 도시의 문화를 이 땅에 전달하는 매개자의 역할에 충실했다는 점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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