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

인천의 여성운동은 여성의 고용안정, 차별대우 철폐를 목표로 출범한 인천 여성노동자회(89.2)에 이어 인천 여성의전화 창립(94.1)으로 본격화 했다.

2001년에는 한국여성민우회(87년 설립)의 11번째 지부로 인천여성민우회가 창립돼 지역 여성운동에 가세했다. 인천YWCA(70년 설립)는 2000년대 들어 이들 진보적 여성단체들과 사안별로 결합, 지역 여성운동의 통합성을 높여갔다.

90년대 지역 여성운동은 생존(고용), 차별철폐, 성폭력·가정폭력 추방 운동으로 부터 시작해 육아, 모성보호 등에 이르기까지 법령 정비 등 제도 개선과 정책의 발전으로 뚜렷한 성과를 이뤄냈다. 여기에는 84년 UN의 여성차별 철폐 협약 가입과 그 이행의 일환으로 95년 12월 제정된 여성발전기본법이 바탕이 됐다.

- 인천 ‘여성한마당’

여성과 성평등의 정치, 사회적 문제를 제기한 인천의 첫 여성대회는 1988년 3월 ‘3·8 세계여성의 날 기념 대동잔치’란 이름으로 ‘일하는 여성 나눔의 집’이 인천대에서 개최한 것이다.

이 대회에서 여성들은 ‘8시간 노동으로 최저생계비 쟁취하자’를 주장했다. 3·8 세계 여성의 날은 1908년 3월8일 미국 여성 섬유노동자들이 여성의 참정권과 노조 결성을 요구하며 가두시위를 벌인 것이 기원이다.

인천여성노동자회(여노회)는 이듬해부터 매해 3월8일 세계 여성의 날을 기해 ‘여성노동자 전진대회’ ‘여성 한마당’ ‘여성대회’ 등의 명칭으로 인천지역 기념대회를 열며 그해의 여성운동 주제를 정해 부각시켰다.

88년에는 여성노동자의 고용 안정, 89년에는 보육권리, 90년에는 평생노동권 쟁취, 91년에는 지방자치 선거와 여성과제, 93년 성폭력특별법 제정촉구 등이다. 97년에 맞은 인천지역 10주년 대회에는 여노회, 민주노총, 보육교사회, 인천연합, 인천지역노동상담연구단체 협의회, 노동정치연대인천지부 여성위원회 등 6개 단체가 공동 주최했다.

인천 여성의전화는 여성인권운동단체로서 가정폭력 등으로 부터 여성의 인권을 보호하고 가정·직장·사회에서의 성평등을 목표로 여성들의 주체적인 사회 참여를 지향했다.

95년 여성발전기본법이 제정되고 96년부터 7월초로 지정된 여성주간에 맞춰 인천시가 참여하는 인천여성대회가 열리기 시작했다. 여성정책 관련 토론회, 문화공연 등의 행사와 평등한 가족관계와 민주적인 부부상 정립을 위한 평등부부상, 인천여성상 제도를 시행해오고있다.

2003년 제6회 인천여성대회에는 보수 성향의 인천여성단체협의회(84년 창립)와 진보적인 인천여성노동자회, 인천여성의전화, 인천여성민우회, 전국여성노동조합 인천지부, 중도적 위치에 있던 인천YWCA 등이 ‘인천여성연대’를 구성하고 대회를 함께 개최해 여성운동의 통합성을 높였다.

- 인천여성발전정책협의회

여성단체들은 여성의 사회문제를 풀어가는데 있어 여성정책에 대한 행정당국의 인식 전환이 절실하다고 보았다. 여성발전기본법은 성적 평등사회 구현과 여성의 사회참여촉진, 여성복지의 증진으로 요약할 수 있었다.

인천시는 98~2002년 간의 1차 여성발전기본계획을 수립 시행해야했다. 인천 여성의 전화, 여노회, 참교육학부모회, 한국보육교사회 인천지부는 96년 1월 인천여성발전정책협의회(정책협의회)를 결성, 이에 대비했다.

정책협의회는 인천시의 여성정책 대상이 저소득층의 생활보호나 소외계층의 요보호 여성만이 아니라 사회 모든 영역에서 남녀평등 실현, 차별구조의 극복이 중요하다는 점을 강조했다.

시혜나 자원봉사, 동원이 아닌 동반자로서의 여성의 사회참여, 성적 평등 구조를 이뤄내기 위해 시가 실질적 활동에 나서야한다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정책수립 과정에서 여성정책과 관련한 가치관, 여성문제의 인식이 중요했고 예산, 조직체계의 개선이 필요했다.

정책협의회는 96년 3월 인천시에 여성정책전담기구로서 여성정책실의 설치, 여성정책자문기구인 인천여성발전위원회 설치, 인천여성발전기금 조성을 건의했다. 인천시는 96년부터 여성발전기금을 조성하기 시작했고 가정복지국을 여성복지국으로 바꾼 후 97년 3월부터 여성정책실로 개편했다.

한편 인천 여노회는 94년 9월 전국 5개 지역 여노회와 공동으로 ‘평등의 전화’를 개설, 임금체불, 비정규직, 고용평등법 위반, 모성보호 등 여성노동자의 문제에 대한 대응력을 높여나갔다.

인천여성의 전화는 95년 8월 성폭력상담소(98년 가정폭력상담소)를 개설해 전문적인 상담활동을 벌였다. 인천여성단체협의회도 98년 12월 가정폭력상담소를 설치해 상담활동에 나섰다.

- 법제정 운동

96년 6월14일 부평3동성당에서 인천지역 20개 시민사회단체가 연대해 ‘가정폭력방지법 제정을 위한 인천지역운동본부’ 발대식을 가졌다.

인천 여성의 전화, 여성노동자회, 참교육학부모회, 부평시민모임, 연수시민모임, 경실련, YWCA, YMCA, 평화와참여로가는 인천연대, 민주주의민족통일 인천연합, 한국복지재단 인천지부, 민주노총 인천본부, 민중교회연합 등 여성의 문제에 지역의 단체 다수가 함께했다.

인천지역의 가정폭력법 방지법제정운동은 가정폭력 피해자로 가해 남편을 살해한 혐의로 구속 기소된 이옥자, 양명숙씨 구명을 위한 서명운동과 동시에 전개됐다.

이에앞서 ‘가정폭력방지법 제정 추진을 위한 전국연대모임’은 94년 5월 결성돼 가정폭력방지법 시안 작성에 나섰다. 한국여성단체연합, 경실련, 민변 등 전국단위 22개 시민단체와 인천을 비롯한 전국 10개 지역본부로 구성된 ‘가정폭력방지법 제정 추진 범국민운동본부’은 서명작업과 여론의 수렴을 거쳐 마련한 입법청원서를 96년 10월 국회에 제출했다.

가정폭력방지법은 98년 7월부터 시행됐다. 이에앞서 ‘성폭력범죄처벌 및 피해자보호법’은 93년에 제정됐다. 99년에는 ‘남녀고용평등법’이 개정돼 직장내 성희롱, 간접 차별 금지조항이 신설됐고 같은 해 사회 모든 영역에서 차별금지 및 차별기준을 고시한 '남녀차별금지 및 구제에관한 법률’이 제정됐다.

◇문화

90년대 인천지역 문화운동에는 서울의 그늘에 가려 종속화한 지역 문화에 대한 현실 인식이 깊었다. 이는 인천과 인천문화의 정체성에 대한 깊이있는 연구로 이어졌고, 또 한편으론 지역문화 인프라에 대한 적극적인 문제제기로 연결됐다.

94년 2월 문화 NGO를 표방한 해반문화사랑회가 창립, 시민 문화운동의 기반을 닦았다. 같은 해 9월에는 민족문화의 전통 계승을 주창한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 인천지회(인천 민예총)가 창립돼 민중의 삶에 기초한 문화예술을 위해 지역예술인들이 연대했다.

98년 들어 ‘인천문화정책연구소’, ‘인천문화를 열어가는 시민모임’, ‘인천문화엔젤클럽’, ‘문화발전을 위한 전문인 사랑방’ 등 전문화된 소규모 문화운동 단체들이 잇따라 조직되면서 지역 문화운동이 활기를 띠었다.

문화정책연구소는 인천시민들의 문화 향수(누리기) 실태조사를 통해 욕구를 충족시키지 못하는 척박한 인천지역 공연 문화를 확인했다. 해반문화사랑회 등은 공연장 찾기운동을 펼치는가 하면, ‘인천문화엔젤클럽’은 입장권사주기 운동, 공연 및 전시회 도우미 활동을 벌이기도 했다.

이들은 6대 도시 중 최하위에 머물고 있던 빈약한 인천의 문화기반시설에 대한 문제를 제기하며 여론을 모아나갔다. 또 인천시 문화재단 설립운동을 벌이며, 단순히 ‘시설 설치형’ 정책이 아닌 ‘문화예술 경영’ 중심의 문화정책을 요구하기도 했다. ‘터진개 문화마당 황금가지’는 개항장을 중심으로 전개됐던 인천 토속문화를 보전하며 알려나갔다.

인천 민예총은 95년부터 ‘황해예술제’를 개최하고 매해 장르별로 확대해 황해미술전, 황해음악제, 황해사진대전, 민족굿(인천상생굿, 풍물대동극), 열린영화제, 함세덕연극제 등 그해의 주제를 정해 대중적인 연례 문화예술행사로 정착시켰다.

- 인천의 정체성, 정주성 보고

98년 11월 해반문화사랑회는 ‘지역정체성과 정주성’을 주제로 제25차 워크샵을 열었다. 인천지역에 대한 사회지도층과 시민들의 의식구조를 살펴봄으로서 인천의 문제를 들여다 보기위함이었다. 이 주제는 인천을 생각하고 연구하는 사람들에 있어 끊임없는 논쟁거리였으며 미완의 과제였다.

해반문화사랑회는 이 주제를 좀 더 파고들었다. 제25차 워크샵을 계기로 20여명의 회원들이 연구에 참여해 기획해오다 99년 6월부터 본격적인 설문조사와 자료조사를 거쳐 11월에 보고서를 냈다.

‘인천지역 엘리트 정주의식조사보고서’다. 연구에는 이흥우 해반 이사장과 공유식(아주대), 정영태(인하대), 정일섭(인하대), 박재윤(인천대), 한치화(가톨릭대) 교수 등이 참여했다.

인천을 이끌어가며 정책결정 등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하는 지역사회 각계 지도층의 정주의식을 조사함으로서 인천의 정체성 부재의 문제를 살펴보았다.

자료분석 결과는 인천지역 엘리트 63%가 인천에 거주하고 있고, 57.7%가 가족과 함께 인천에 거주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일반시민 80%가 인천에 직장을 갖고 있는 것에 비해 매우 적은 비율이었다.

엘리트 중 인천시 정책자문위원은 58.3%를 차지하고 있는 대학교수의 경우 가장 낮은 정주비율(30.4%)을 나타냈다. 보고서는 사회통합과 사회발전을 추구하는데 결국 엘리트의 거주가 중요하며, 따라서 정주비율을 높이는 방안을 강구하자는 것으로 여론을 환기시켰다.

해반문화사랑회는 2002년 집중적으로 이뤄진 인천시의 문화예술 중장기종합발전계획에 연구진으로 참여하여 인천문화의 정체성과 관련해 정리한 결과를 내놓는다.

각종 문물이 넘나드는 개방된 해양도시, 국적과 지역성이 타파되는 화해와 융합의 도시, 한국근대사의 관문, 남북교류와 화해의 교두보 등이 그것이다.

인천의 특성과 정체성을 찾아가기 위해 구도심에 버려진 근대유물들이 주는 의미들도 다시 살펴보기 시작했다. 개항과 함께 기독교와 서구식 의료, 교육제도, 우편과 통신, 철도 등 서구 문물들이 인천을 통해 서울로 유입되었고 그 흔적들이 내리교회, 답동성당, 성공회 건물, 인천우체국 등으로 남아 있어 100년 전 한국 근대사가 인천에 농축되어 있음을 확인했다.

송정로기자 goodsong@i-toda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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