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부경찰서가 자리하는 곳에 일본인 간장공장이 있었다. 그리고 맞은편 금곡동 골목으로 들어서는 코너는 차부였다. 자동차에 연료를 주입해 주거나 간단한 정비도 하는 곳이었다.

그때는 그런곳을 차부라고 했는데 그것 역시 중년의 일본인 부부가 운영하고 있었다. 가난한 조선인 동네에 한곳뿐인 2층집이어서 눈에 띄었다. 바로 옆에는 정미소요 인근에 성냥공장 고무공장이 있어 그곳에 자리잡은듯 했다.

그시절 자동차는 소위 카바이트차였다. 1931년 만주사변이라는 전쟁을 도발 부족한 휘발류를 대신해서 카바이트 연료로 달리는 자동차였다. 1937년 시운전을 거쳐 선을 보였는데 하루에도 몇번이고 막히는 연통 소제를 해야하고 찌꺼기를 제대로 처리하지 않아 길바닥과 주변이 하얗게 되었었다. 그리고 차부에는 마치 빨갛고 희고 푸른 무늬가 돌아가는 이발소 표지 처럼 불빛이 돌아가는 급수대가 서있었다. 그러나 카바이트 마저 구하기가 어려워 목탄차가 등장했다.

지금도 금곡동 차부 자리에는 당시의 건물이 그대로 서있다. 겉으로는 칠을 하는등 단장하여 옛 모습을 찾아보기 힘드나 기와지붕과 창문이 그대로이다. 1940년 우리나라의 자동차 총대수 7천326대중 카바이트차가 200대 목탄차는 1천대가 넘었다고 하는데 그때 인천에는 자동차 몇대가 있었을까.

연도별 통계로는 인천시의 자동차 등록대수가 이렇게 나타난다. 1974년에 7천34대, 1980년에 1만7천473대이던 것이 1988년에는 8만1천94대에 이른다. 그리고 지난 5월말로 무려 80만8천29대에 이르렀으며 오는 2008년에는 100만대를 돌파하리라 한다. 그러나 자동차 100만대 시대를 인천은 과연 자랑할만 하고 그것을 수용할만큼 기반시설은 되어 있는가.

자동차가 끼치는 폐해가 거론된지는 오래다. "미래의 인류사회"를 쓴 영국의 인류학자 워딩톤은 사람과 자동차의 밀월관계는 끝났으며 자동차는 귀찮은 파트너일 뿐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자동차의 첫번째 폐해를 사람의 행동의 자유를 빼앗는다는 것과 둘째 대기오염 셋째 교통사고로 인한 인명피해를 들었다.

100만대의 자동차가 인천에 끼칠 편의는 무엇이고 폐해는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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