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진 바람과 매서운 추위를 뜻하는 ‘손돌풍’과 ‘손돌목 추위’라는 옛말이 있다. 이 말은 강화군 길상면 광성진과 김포군 대곶면 신안리 사이의 험악한 수로 ‘손돌목’에서 유래했다.

삼남지방에서 올라온 대동미(大同米)가 서울 한양으로 가기위해 꼭 거쳐야 하는 바닷길이 바로 손돌목이었다. 당시 대동미는 서구 원창동 ‘갯말’ 전조창(轉糟倉)에서 밀물 때를 맞춰 손돌목을 거쳐 한강을 거슬러 올라간 용산의 경창(京倉)에 도착했다.

손돌목은 범인(凡人)들의 왕래를 쉽게 허락하지 않았다. 수로의 바닥에는 사슴뿔 모양의 암초가 수없이 깔려있고, 여울은 소용돌이쳐 왠만한 사공이 아니면 건널 수 없는 곳이었다. 게다가 물이 밀었다 쓸리기까지 만조시간은 5시간 남짓한데다 수위가 가장 높은 ‘사리’때라야 수심이 5.5m에 머물렀다.



김포면 대곶면 신안리 덕진포대지 돌출부에 ‘주사손돌공지묘’(舟士孫乭公之墓)라 새겨진 손돌목의 일화는 이렇다.

1231년 고려 고종이 몽고의 난을 피해 배를 타고 이곳을 지나고 있었다. 하지만 앞은 꽉 가로막혀 보이지 않고 물살은 사나워 배가 조리질 쳤다. 손돌이 띄운 이 배는 요동을 쳤다.

고종은 ‘사공이 나를 죽이려 한다’고 크게 화를 내며, 손돌의 목을 치라고 호통을 쳤다. 손돌은 바가지를 바닷물 위에 띄우며 ‘뱃길이 위험하니 내가 죽더라도 바가지를 따라 노를 저으라’고 마지막 유언을 남겼다.

그 뒤 하늘에는 먹구름이 뒤덮고 광풍이 휘몰아쳤다. 배는 격랑에 가랑잎처럼 춤을 추기 시작했고, 죽은 손돌의 뒤를 이어 노를 잡은 사공은 아연실색, 제대로 노를 젓지 못했다.

다급했던 고종은 손돌의 유언대로 사공에게 바가지를 따라 노 젓기를 명했고, 천신만고 끝에 험난한 여울에서 빠져 나왔다. 그 후 서울로 환궁한 임금은 손돌의 무덤 앞에 사당을 짓고 손돌이 죽은 10월20일에 제사를 지내 원혼을 달랠 것을 신하들에게 명했다.

공연히 의심해 손돌을 죽인데 대한 참회의 뜻이었다. 지금은 손돌의 묘지에는 세운 사당은 오간데 없고 김포시가 세운 묘비만이 서 있을 뿐이다.

이 손돌목은 굴포와 무관치 않다. 옛날의 대규모의 물량 수송수단은 거의 수운이었다. 하지만 한양으로 이르는 손돌목의 험난한 여울로 막대한 피해가 불가피했다. 이 피해를 덜기 위한 방책이 인천 앞바다에서 한양을 곧장 연결하는 수운의 건설이었다. 이것이 바로 지금의 경인운하다.

이 경인운하는 당장 어제 오늘의 얘기만은 아니다. 수로를 파기로 처음 구상한 시절은 고려 의 고종 때로 지금으로부터 775년 전의 일이다. 실제 한강변 신곡리에서 부평 뜰을 가로 지르는 60리의 수로를 곧게 뚫어 직포(直浦)를 내고, 서해 인천교 개골창에서 부평 원통이 고개 앞까지 국책사업으로 굴포 공사를 한 것이 470여 년 전인 조선조 중종 때다.




(▲지대가 낮은 굴포천 유역은 매년 물난리를 겪어야만 했다.경인운하 건설의 명분도 해마다 되풀이했던 굴포천 유역의 침수피해를 막기 위해서였다. 사진은 지난 1991년의 갈산지구 침수피해 복구현장.)

인천시 서구 백석동에서 김포시 고촌 전호리까지 길이 18km, 폭 100m, 수심 6m의 경인운하 사업은 800년전의 과거와 맞닿아 있다.

50년전엔 '물 반 고기 반'


원통·청천천 합류 부평세관 주변 '사근다리' 풍경


“부평 동초등학교 다닐 때인데 여름철 학교 갔다오면 오죽 더워, 집에 책보를 던져 놓고 사근다리 위에서 ‘풍덩’하고 몸을 던졌지, 물도 꽤 고여 있었고, 개울 밑은 모래바닥으로 푹신했지. 그 때 청천천과 원통천 물은 정말 맑았어!” 이종식(58)씨가 기억하는 50여 년 전의 사근다리는 아이들의 수영장이자 좋은 놀이터였다.

지금 부평세관 인근의 사근다리는 원통천과 맑은 내 청천천이 만나는 곳이다. 원통천의 원래 물줄기는 신촌을 거쳐 부평 조병창 안으로 가로지른 뒤 산곡동 우성아파트 옆을 지났다. 이어 1950년대 초에 만든 화랑농장 골짜기의 물과 합쳐져 부평구청 뒤 근린공원 남쪽인 신트리 마을로 흘러들었다.

안하지 도둑골에서 발원한 청천천은 ‘마제이’(馬場) 앞으로 해서 대우자동차 공장을 꿰뚫은 뒤 사근다리 근방에서 원통천과 합류했다. 마제이는 효성동과 청천동, 산곡동 일대로 억새풀이 우거져 고려 때부터 말을 키우던 곳이라고 해서 지어진 이름이다.

하지만 원통천은 부평조병창 건설 때 신촌에서 동아아파트 인근 롯데백화점 앞으로 물줄기가 돌려졌다. 청천천 물길도 1962년 대우자동차의 전신인 새나라자동차 공장을 지을 때 부평관광호텔 앞으로 방향이 뒤틀렸다.

이렇게 해서 합쳐진 원통천과 청천천, 두 하천 물은 한강수리조합의 서부간선수로에 흘러들어 한강으로 빠져 나간다.

여기에 얽힌 추억을 간직한 이들도 적잖다. “그 당시 굴포천에 물고기가 얼마나 많았지, 구멍을 낸 깡통에 줄을 달아 물속에 던져 놓고 휘~익하고 휘저어 끌어당기면 물고기가 한 깡통 들어있었다니까.” 청천천이 한강과 이어진 서부간선수로의 맨 끝자락과 맞닿았던 덕이다.

종석씨는 사근다리에서 합쳐진 원통천과 청천천이 갈산동 주공아파트를 지나 삼산지구로 내달렸던 개울, 굴포천에서 그물로 곧잘 메기를 잡아 올린 기억이 또렷하다.

물고기가 많으면 새들은 저절로 찾는 법. 부평구청 앞에 지금도 있지만 원통천과 청천천이 만나는 곳에는 삼각형 모양의 모래톱이 있다. 갈대와 잡초가 무성한 이 삼각주는 새들이 숨어 지내면서 둥지를 틀기에 괜찮은 장소다. 최근 2년 전부터 여름 철새인 흰댕기해오라기 한 쌍이 매년 날아들어 먹이와 휴식을 취하고 있는 모습이 목격되고 있다.



사실 사근다리 원래 이름은 ‘삭은다리’였다. 나무로 만들고 세월이 오래 지난 탓에 낡게 돼 붙여진 이름이다. 삭은다리는 서부간선수로에 놓인 15개다리 중 가장 작은 다리였다. 사람들의 이용이 뜸한 탓에 거의 방치하다시피 해 삭아서 빈 몸으로도 건너가기 위험할 정도였다는 것이다.

이 삭은다리의 정확한 위치는 알 길이 없다. 대충 지금의 부평세관 근방이라고 점쳐질 뿐이다. 없어진 삭은다리를 대신해 새로 생긴 콘크리트 다리를 사람들은 사근다리로 부르고 있다.

장마때면 한강 물 '역류' 드넓은 곡창지대 바다로


갈산·산삼산동 부천 상동 일대


본디 ‘넓은 뜰’이라는 뜻을 지닌 부평은 황량하고 습한 저지대를 개척해 큰 곡창지대를 만들었기 때문에 붙인 이름이다.

한강이 만수위 됐을 때 굴포천 유역은 40%가 저지대로 남아 있을 수밖에 없는 지세다. 지금은 아파트 단지로 꽉 들어찼지만, 얼마 전까지 만해도 곡창지대인 부평 갈산·산삼산동과 부천의 상·중동은 장마철 역류하는 한강 물에 잠기곤 했다.

오죽했으면 김포의 신곡리에 동양에서 최대 규모의 펌프장을 설치했을까. 장마철 넘치는 굴포천의 물을 한강으로 퍼 넘기고, 평소에는 한강 물을 논 농사용으로 서부간선수로에 대가 위해서였다. 홍수의 최대 피해지역은 역시 삼산동 일대다.

그 중에서 영성미는 앞뜰은 항상 물바다를 이뤘다. 1924년 한강수리조합을 설치할 당시 갈산에서 영성산으로 이어지는 산 등성이를 끊고 서부간선수로를 팠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삼산동과 중동, 상동의 경계를 이루는 영성미 앞들에는 원통천과 청천천은 부천의 돌내(석천) 등 세 개의 개울이 한데 모이는 장제못이 있었다. 지대가 높았던 이 장제의 물은 목수통에서 계양구 벌말까지 인공으로 파 낸 직포(直浦)로 이어졌다.

목수통은 목이 좁아서 미처 빠져 나가지 못한 개울 물로 항상 유수지 현상을 빚곤 했다. 이 목수통은 한강을 역류한 조수까지 들락거려 배수가 잘 되지 않았다.

부평수리조합이 생긴 뒤 농지개량 사업으로 장제못이 모두 논으로 변했고, 개울만 뚫은 탓에 삼산동 영성미 일대는 비만 왔다면 진흙탕이 굽이쳐 물난리를 겪어야만 했다. 장마가 지면 삼산동은 물론이고 부평경찰서가 있는 청천동 초입까지 넘치는 물에 둥둥 떴을 정도였다.

하지만 서부간선수로말단에서 계양을 거쳐 서구를 통과, 서해로 빠지는 굴포천 방수로 1단계 공사가 완료된 뒤 삼산동 일대는 최근 3년간 물난리를 걱정하지 않아도 됐다.

박정환기자 hi21@i-toda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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