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시정부의 수반 및 임시의정원 이끈 독립운동가
1946년 장례시 비상국민회의가 건립한 묘비 전시

1919년 4월 2일은 인천 자유공원에서 한성정부 조직을 결의한 날이다. 한성정부는 전국 각 지역의 대표자대회를 통해 수립된 임시정부로, 독립운동의 구심점이자 오늘날 대한민국의 시작점인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모체이다. 한성정부의 수립은 굴곡진 한국 근현대사 속 위대한 한 장면임에도 불구하고, 이를 알고 있거나 기억하고 있는 사람은 매우 드물다.

지난 4월 2일부터 시작된 인천광역시립박물관의 작은전시 '만오 홍진, 100년의 꿈을 쓰다'가 여름방학과 광복절을 맞이하여 관람객들의 뜨거운 관심을 받고 있다. 

홍진(洪震,  1877 ~ 1946년)은 한성정부의 산파 역할을 했으며,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수반과 임시의정원을 이끌었던 독립운동가이다. 대한제국 법관양성소 출신의 변호사 홍진은 “조선이 독립한 나라이며, 조선인이 이 나라의 주인임”을 선언한 3ㆍ1운동을 경험한 후 나라를 운영할 체계적 조직의 필요성을 깨닫는다. 근대적인 민주공화정체의 정부를 수립하기로 하고 전국 13도 대표자대회를 열기로 했다. 

대표자들은 민주제와 대의제(代議制) 등 오늘날의 헌법적 가치가 고스란히 담긴 약법(約法)을 내걸고, 이승만을 집정관총재로 추대하였다. 1919월 4월 2일, 각 지역 국민대표의 이름으로 ‘한성정부’가 결의되었다. 그리고 4월 23일 서울 종로에서 「국민대회 취지서」와 「국민대회 선포문」을 배포함으로써 널리 선포하였다. 
 
홍진은 임시정부의 수반인 국무령을 맡는 한편, 지금의 국회의장인 임시의정원 의장을 세 번이나 역임하며 민주공화정과 의회정치의 기틀을 다졌다. 특히 독립운동의 방법을 둘러싸고 의견이 나뉘어 갈등할 때마다 희생과 통합의 리더십을 발휘하여 어려운 시기를 헤쳐 나갔다. 광복 이후에는 비상국민회의 의장직을 맡아 통일정부를 수립하기 위해 애썼지만, 결실을 보지 못한 채 눈을 감고 말았다. 의로운 지도자의 가는 길을 평생의 동료이자 친구인 김구, 조소앙 등이 배웅하였다.

홍진은 한성정부를 수립한지 27년 만에 인천으로 돌아왔다. 유언에 따라 선영이 있는 문학산 자락에 잠든 것이다. 이번 작은전시 '만오 홍진, 100년의 꿈을 쓰다'에서는 1946년 장례 당시 비상국민회의가 건립한 묘비를 전시한다. 이 묘비는 38년간 홍진의 묘소를 지키다가 1984년 서울  국립묘지로 이장(移葬)할 때에 박물관으로 옮겨온 것으로, 옥외전시를 마친 후 수장고에 보관한지 15년 만에 공개하는 것이다.

묘비 외에 한성정부 국민대회 취지서 및 선포문, 그리고 대한민국 임시의정원장으로서 홍진의 업적을 재조명할 수 있는 사진과 유묵(遺墨) 등을 만나 볼 수 있다. 

시립박물관 관계자는 “오늘날의 대한민국은 임시정부로부터 비롯되었으며 그 모체는 한성정부에서 찾을 수 있다”고 하며, “자유롭고 평등한, 통일 민주공화국의 꿈은 여전히 유효하다. 일제강점기라는 가장 엄혹한 시기에 100년의 꿈을 처음 써내려갔던 홍진을 기릴 수 있는 자리가 되길 바란다”고 말했다.

이번 전시는 올해 10월 27일까지 계속된다. 시립박물관 관람시간은 매일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이며, 매주 월요일 및 공휴일 다음날은 휴관한다. 관람료는 무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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