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군은 12살난 중학 1년생이었다. 신문배달을 하면서 학비를 벌었다. 벌써 2년째였다. 그러니까 초등학교 6학년 적부터 배달에 나섰다는 이야기이다. 할머니와 둘이 남의 집 문간방에 살면서 살림은 할머니가 그럭저럭 하시지만 작은 돈이라도 보태겠다고 시작한 일이었다. 학교가 끝나면 보급소로 달려가 신문 뭉치를 넘겨받아 들고 집집마다 뛰어다녔다. 그때는 대개의 신문이 석간이었다.

처음 김군이 맡은 부수는 200부였다. 옆구리에 끼고 뛰기에 벅찬 무게여서 배낭에 나눠 넣어 메고 다녔다. 사무실도 있고 상점도 아파트에도 배달했다. 층계를 오를때는 힘들었으나 훈련이 되어서인지 견딜만 했었다. 이따금 신문을 받아 보시는 어른들로부터 칭찬도 들었다. 어린 녀석이 용타고 격려도 하시고 선물을 주실 때도 있었다. 학용품을 사주시고 추울 때는 장갑을 주시기도 했다.

그때는 친구를 도와주겠다는 기특한 또래도 있었다. 직접 신문을 배달하는 것은 아니나 친구의 무거운 짐을 나누어 들고 따라나서는 녀석이었다. 후에 어른들이 아시고 꾸중을 하시기도 했으나 막무가내요 아예 배달소년이 된 녀석이었다. 김군은 신문기자 아저씨들의 주선으로 어느 단체의 장학금을 받은 적도 있었다. 어느 겨울 시장님으로부터 두터운 점퍼를 선물받을 때 제일 신난다는 녀석이었다.

12살 배달소년 김군은 할머니를 잃었다. 늘 힘들어 하셔서 그러려니 했는데 덜컥 자리에 누우시고 그것이 암이라고 했다. 병원출입 한번 제대로 못하시고 눈을 감으셨다. 먼 일가 친척이 나서 장례를 치렀으나 김군은 천애의 외톨이가 되었다. 이웃과 학교 그리고 신문사에서 나서 성금을 모아 주었다. 그것을 목돈으로 은행에 저축하고 통장은 담임선생님이 관리하셨다.

김군 같은 처지를 오늘날에는 소년소녀가장이라고 한다. 그리고 그같은 경우가 어찌 그리 많은지. 그러나 그들은 한결같이 굳세게 커가고 있다. 주변의 보살핌도 예전 보다 애틋하다. 그들은 대견하고 의젓한 생각을 가진 앞날의 희망들이다. 그들을 위한 ‘행복한 띠잇기’를 접하면서 20년 전의 배달소년 김군이 어떻게 성장했는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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