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기 / 정승열

나는 색을 지우는 화가
싱크대 설거지물에다 변기 물을 섞고
라디오 음악 소리에 전화소리를 뒤섞어
버스 뒷좌석 바퀴가 돌고 있는 즈음에 배설을 하면
하루라는 그림이
뭉개진 조간신문 활자들처럼 한없이 시커멓다.
그래서 나는 까매진 생명들의 흔적에서
색을 건져내어 하나씩 하늘에 흩뜨린다.
누구도 나를 제대로 목격한 사람은 없다.
그래서 나를 탓하는 사람은 없다.
그래서 나는 투명하다.
바다에 빠진 아이들에게서 꿈을 빼앗아
허공에 파란색으로 흩뜨릴 때에도
사람들은 정작 내 죄를 보지 못했다
내가 노랑, 빨강, 연두, 주황색을 거두어
하나씩 하늘에 그림으로 그려낼 때에도
누구도 그 감동을 목격하지 못했다.
그래도 나는 그림을 그린다
모든 주검으로부터 색을 걷어내어
하나씩 허공에 흩뜨리는 나는
투명의 화가다.

 ※정승열 시인은…
1947년 인천 출생, 1979년 시문학으로 등단. 인천문인협회 시분과 회원, 내항문학회 36년간 회원. 인천문협 34대 회장 역임, 시문학회 회원, 새얼백일장 심사위원, 삼산중학교 교장 역임.
수상 : 인천광역시 문화상 수상, 인천예총 예술인상 수상. 시집으로 '새가 날개를 퍼덕여도 숲은 공간을 주지 않았다', '단풍', '단풍 2집', '연기' 등이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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