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자와 논쟁을 벌이고 싶은 생각은 없다. 그러나 논어 안연 편에 나오는 민무신불립(民無信不立)의 이야기는 시중의 인용 사례와 조금 다른 재해석이 필요하다는 생각이다.

워낙 유명한 문구이지만 그 내용을 줄여서 옮겨 적자면, 공자가 생각하는 정치는, 백성에게 먹을 것을 충족시키고(족식 足食), 군사를 충분히 갖추며(족병 足兵), 백성이 믿도록 하는(민신 民信) 것이거니와 이중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이 백성의 믿음을 확보하는 것이라는 것이다.

물론 현실적으로도 공자의 제자들은 먹을 것을 마련해 주지 않는 공자를 따라서 철환(轍環)하기도 하였고 도원결의로 뭉친 유·관·장 삼형제에게 믿음과 의리 이상의 더 소중한 것이 있었을 리도 없다.

그러나 아무리 인의예지신이 살아 숨 쉬던 시대였다 한들 정말로 밥을 주지 않고 적으로부터 안보도 보장하지 못하는 군주를 오직 믿음 하나로 따르는 백성들이 있을 수 있을까. 믿음의 대상이 미륵이나 재림 예수가 아닐 바에야, 도대체 밥과 안전을 보장하지 못하는 군주가 따로 백성들에게 줄 수 있는 믿음이라는 것이 있을 수 있는 것일까.

물론 공자의 이야기가 왕과 백성 사이의 신뢰의 중요함을 그만큼 강조하기 위한 수사(修辭)라는 것이야 그의 사상을 가장 충실하게 잇는 맹자의 항산항심론(恒産恒心論)이 부연하고 있는 것이니 무지한 시비를 계속할 일은 아니다.

맹자 원문의 인용을 생략하고 요약하거니와 “현명한 군주가 백성의 생업을 관장할 때에는, 반드시 위로는 부모를 섬기기에 충분하도록 하며, 아래로는 처자를 기르기에 충분하도록 하며, 풍년에는 1년 내내 배부르게 하고 흉년에는 죽는 것에서 벗어나도록 합니다. 그런 후에 백성들을 선(善)으로 나아가게 하는 것이니, 그러므로 백성들이 따르기가 쉬운 것입니다. (양혜왕 편)”라고 하여 맹자는 오해가 따를 수 있는 공자의 가르침을 보정하였다.

그렇다. 동서고금을 가릴 것 없이 나라를 보전하는 최소한의 조건은 그 나라가 있음으로 해서 그 구성원들이 먹고 쓸 것을 충분하게 조달할 수 있어야 하고 외적(外敵) 따위 생명의 물리적 위협으로부터 안전이 보장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조건이 나라의 살림을 책임지는 권력에 의해 철저하게 보장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사실 나라가 값을 하여야 하는 데 대해 무슨 이런 긴 설명까지가 필요할 것인가. 인류 역사상 어느 시대 어느 나라라고 해서 백성들이 무엇으로 먹고 살 것인가를 걱정하지 않은 왕조가 있고 정권이 있었는가. 그런데 이토록 당연한 이치가 오직 오늘 이 나라에서는 통하지 않고 있는 것 같으니 기가 막힌 일이 아닐 수 없다.

근자에 이르러 국내외 대소의 매체들에 심심치 않게 대한민국 경제의 경쟁력 추락이 보도되고 있다. 대한민국의 경제가 대들보같이 믿고 있는 전자, 자동차, 조선, 철강 각 분야의 경쟁력이 심각하게 도전을 받고 이미 많은 부문에서 중국의 추월을 허용한 사례들이 이제는 일부 전문가들만이 알고 있는 정보가 아니다.

현대 기술의 경쟁시장에서 한 번 첨단 기술력이 추월당한다는 것은 병가지상사 정도로 치부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기술이 첨단으로 갈수록 투입되어야 하는 개발비용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고 실패의 리스크도 급격하게 높아진다.

그만큼 한 번 경쟁자에게 뒤떨어진 영역을 따라잡기 위해서는 그 이전에 기울인 노력의 몇 배의 노력이 경주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게 되는 것이고 대개는 한 번 뒤떨어지면 그것으로 그만이라는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 노키아가 그랬고 소니가 그랬으며 합병의 고배를 마시며 사라진 많은 세계적인 자동차 회사들과 전자 제품 회사들이 그러한 사례를 증명한다.

특히 대한민국은 경제의 수출입무역의존도(수출+수입/GDP)가 80~100% 이상을 넘나드는 해외부문 과다 의존형 경제다. 해외 경쟁에서 주요 수출품들이 타격을 받을 경우 이를 보완하고 지켜줄 수 있는 내수 경제력이 우리에게는 없다는 얘기다.

우리의 외환시장은 작은 경제력규모에 비해 지나치게 높은 외화 의존도로 인해 외국의 투기적 자본에 대해 방어력을 거의 가지고 있지 못하고, 출렁이는 환율이 우리 기업들의 가장 큰 고통 중에 하나라는 사실은 어제 오늘의 이야기가 아니다.

이런 속에서 기업들은 마땅한 투자처를 찾지 못해 방황하고 있고 시중에 떠도는 막대한 부동자금은 지금도 투기의 기회만을 노리며 허공을 떠돈다. 날로 국제적인 생산 경쟁력을 잃어 가는 노동집단은 오로지 이기와 탐욕 이외에 생각할 줄 아는 것이 없는 단세포화가 완료된 것 같고 온 국민의 허영에 들뜬 소비는 이제 타성에 빠져 고삐를 잡기 틀렸지 싶다.

미봉책으로만 존재 이유를 유지해온 역대 정권의 소위 경제 정책들은 어떠한 원천적인 지향을 제시하는 데에 번번이 실패하였고 그나마 표(票)의 눈치에 함몰되어 인기영합에 골몰하고 초고도 근시가 되어버린 지 오래다.

박근혜 정부가 들어서면서 내놓은 창조경제 또한 그 실체를 아직까지 알 수가 없고 그의 실현 형식으로 등장한 최경환표 전략에는 고의적인 인플레이션 조작 이외에 어떠한 창조적인 비전도 보이지 않는다.

아예 정치를 포기한 이 나라의 국회에 무엇인가를 기대한다는 것은 이제 말을 꺼낼 가치조차 없지 않은가 싶고, 오직 미국 물에 젖은 소위 이 나라의 경제 전략 전문가들의 ‘모델’과, 시고 떫은 ‘전략’들은 현장에서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 아니, 그들의 정치인 수준을 넘어서는 패거리 짓기와 허세들은 이미 이 나라의 이성적 결정을 방해하는 중요한 암적 요소가 되고 있지 않은가.

어쩔 것인가. 그래도 오직 남은 희망은 이 나라의 국민이고 시민이 아닌가. 이제 모두 모여서 먹고 살 ‘거리(꺼리)’의 걱정을 하자고 목소리를 합쳐야 할 때가 아닌가. /하석용 공존회의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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