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자는 백성을 다스리는 요체로, 배불리 먹이는 것, 군대로 나라를 안전하게 지켜주는 것, 믿음을 주는 것, 세 가지를 꼽았다. 그중에서도 제일가는 통치의 덕목을 백성들과 통치권의 사이에 믿음을 쌓는 일이라고 했다 (논어, 안연편).

그로부터 2,500년이 지난 오늘까지 이 가르침은 정치의 학문적 영역에서, 현장에서 일정한 권위를 갖는다. 그래서 많은 정치인들이, 결국에 가서는 그 결론을 자신의 이기적 잣대로 왜곡시킬망정, 언필칭 국민과의 신뢰를 간단없이 맹세하지 않는가.

왕정시대의 통치와 충성 아직도 유효한가

그러나 이렇게 만고불변하는 진리일 것 같은 성현의 가르침이라도 세월을 따라 그 해석이 바뀌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2,500년 전에 나라의 개념은 분명했고 그에 속하는 국민의 범위도 명백했다.

왕 한 사람의 통치력이 미치는 범위가 국가이었고 그 영역 내에 거주하는 자는 그 왕의 백성이었으니까. 그러한 전제 속에서 국가와 백성이 교환하는 권리와 의무관계도 비교적 명백한 것이었다. 백성의 통치권에 대한 유일한 의무는 충성이었고 그에 대한 왕의 의무는 앞에서 공자가 밝힌 대로다.

그가 백성에 대해 쌓아야 하는 신뢰라는 것도 결국 풍요와 안전, 두 가지 의무를 자신의 모든 능력을 바쳐 지속할 것이라는 것과 탐학스런 권력이 되지 않겠다는 것으로 개념이 명백했다.

그런데 이러한 기준들은 아직도 유효한 것일까.

오늘날이라고 해서 국가의 경계가 사라진 것은 아니지만 많은 국민들이 민족, 이데올로기, 개인적인 이익 따위 다양한 이유로 자신이 속한 국가를 부인하기도 하고 국경 너머에서 주권을 행사하는 이중적인 국민들도 다수 존재한다. 오늘날 국가에 대한 충성은 헌법의 규정이 어떻건 간에 개인적인 선택의 영역으로 변질하고 있다.

아직까지도 경제학 교과서에서는 공권력의 경제적인 의무를 완전고용과 물가안정이라고 읊고 있지만 오늘날 국민들의 배를 불리는 일은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고용의 형태도 정규, 파견, 임시, 계약, 기간, 상근, 비상근, 알바 등등 수도 없이 다양하려니와 그 존속기간 또한 명퇴, 황퇴, 사오정 등 도무지 원칙이 성립하지 않는다. 무엇을 완전고용이라고 할 것인지 조차가 분명하지 않다.

물가안정이라는 주제 또한 간단하지 않다. 어느 지방자체단체장은 임기 중에 자신이 지역의 부동산 가격을 잔뜩 올려주었다고 자랑을 삼고 다니기도 했고 실제로 그러한 현상에 박수를 보내는 계층들이 적지 않게 존재하는 것이 현실이다. 모든 국민의 배를 부르게 한다는 복지 논쟁에 이르고 나면 공자에게 그 해답을 직접 여쭈어보고 싶은 생각이 간절해진다. 답을 가지고 계시냐고.

자신들이 모두 스스로 왕이어야 하는 사회

자신들의 목숨 부지와 직결된 국방에 대해서도 하나의 답밖에 없어야 할 것 같지만 대한민국의 안보 논쟁을 지켜보고 있자면 천만의 말씀이다. 게다가 대한민국의 권력은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라는 헌법의 규정과 마주하고 나면 공자의 가르침은 더 이상 설 곳이 없다.

자신들이 모두 스스로 왕이어야 하는 사회에서 누가 누구에게 무슨 신뢰를 쌓고 말고 할 것인가. 그 상징성과 선언성, 그 다음에 오는 실현의 방법론을 무시한 채 자구(字句) 그 자체를 우격다짐하는 소위 ‘국민’들에게 더 이상 ‘국가’라고 하는 권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누구나 살고 싶은 대로 살아가면 되는, 역설적으로 인류의 이상이 가장 잘 실현되고 있는 곳이 오늘의 대한민국이 아닌가.

이런 현실 속에서 정당정치라는 것이 의미를 갖는다면 그것은 난센스다.

사회 구성을 위한 원칙과 권위, 순리가 무너진 사회에서, 정당은 오직 권력과 그에 따르는 이익을 좇는 모리배 집단 이외의 무엇일 수 있겠는가. 그래서 그들은 스스로의 이성에 의해 자신들의 진로조차 정하지 못하고 자신들의 논리에 따라 공직 후보를 정할 수도 없는 것이 아닌가.

여론이라는 도깨비와 조사라고 하는 방망이

이제 이 나라에서는 정당법이 정한 원칙은 사라지고 여론이라고 하는 도깨비와 조사라고 하는 방망이가 결합하여 국론을 조작하고 언론이라는 장사치들은 이를 희롱하며 돈을 번다.

백번을 재고해도 이 나라에 정당이 필요한 이유를 알 수 없고 내가 그들을 유지시키기 위해 세금을 내야 하는 까닭을 모르겠다. 결국 나는 그들의 여론조사 비용을 조달하고 있을 뿐이지 않는가.

이 아비규환의 사회에서 국가와 국민의 신뢰 따위를 논하기보다는 정당이라는 패거리를 없애는 시도가 좀 더 우선적이고 현실적이지 않겠는가. 다음 번 지방선거에서부터는 무정당의 실험이 시작되기를 간절히 희망한다. /하석용 공존회의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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