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천시 동구 배다리에서 창영초교 영화정보여고와 창영교회 인천세무서로 해서 옛 전도관에 이르는 고갯길을 "우각로"라고 한다.

개항당시 벽안의 서양인들이 드나들던 무렵 서울을 오가는 이를테면 경인가도였던 곳이다.

항구에서 배를 내려 하룻밤 몸을 추스린 이국 나그네들은 이길을 통해 가마를 타든 당나귀에 실리든 서울로 향했다.

이른 아침 마부들이 당나귀를 몰아 손님을 찾아 나서면 방울소리에 잠을 깬 여행자들은 서울길을 서둘렀다.

당나귀에 실려 변두리의 한 언덕에 올라 시내를 돌이켜 보면서 동쪽을 향해 발길을 재촉했다.

반대로 서울을 떠난 여행자들은 허위허위 이언덕에 도달 저물어가는 시내 쪽을 바라보면서 드디어 도착했구나 생각했다.

이 고갯길이 쇠뿔고개였다. 땅의 형국이 어떻길래 그렇게 보였는지 몰라도 흡사 소의 뿔과 같다고 해서 그렇게 불리웠다.

한자로 소牛에 뿔角을 빌어 비로소 우각리(牛角里)가 되었다. 당시 서양인들의 기록을 모아 간행한 ‘인천의 산책자들’에도 한 기자가 기록한 쇠뿔고개를 말을 타고 넘기에는 너무 가팔라 걸어서 넘었다는 대목이 보인다.

이후 서양선교사의 주택이 들어서고 인천 최초의 학교가 시작되고 지식인들이 거주하면서 제법 활기찼다.

해방직후에도 각종 문화행사가 이곳에서 있었다. 문인들이 동인활동을 하고 광복 후 우리나라 최초의 문예지도 발간되었다.

그러나 지금은 쇠퇴하여 긴 잠에 빠져 있다. 쇠뿔고개니 우각리라고 하면 이해할 사람 드물고 창영동조차 이웃 금곡동과 통합하여 금창동이 되었다. 영세한 몇몇 상점이 명맥을 잇고 차량도 일방통행이다.

그런데 최근에 그것마저 막힐 운명이라고 들린다. 유동에서 경인철도 밑으로 해서 수도국산 터널로 연결하느라 교차지점을 굴착, 옹벽을 쌓고 측도로 돌아가게 한다는 것이다. 완전폐쇄가 아니라고는 하나 죽은 도로가 될 것임이 틀림없다.

도로를 이용할 시민의 불편이나 주민의 불이익은 아랑곳 없다. 유서깊은 도로를 그렇게 대접해도 되는지 궁금하다. 도로는 무형문화재일 수 없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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