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내 학계에서 인류학과 민속학을 전방위적으로 두루 섭렵한 학자는 몇 안된다.
고대부터 현대에 이르는 인간 삶의 방식과 패턴을 연구하는 학문이 인류학으로, 특별히 민중생활사적 측면에서 접근, 성찰의 강도로나 양적인 면에서 독보적인 성과를 쌓고 있는 이가 조경만 박사다.

그가 관심을 쏟는 분야는 항구도시가 끼고 있는 갯벌과 섬, 그리고 그 안에 사는 사람들이다. 필연적으로 생태학적 다양성을 갖춘 지대에서 문화의 다양성을 보는 것, 그것이 연구의 출발점이자 동시에 도달점이 된다.

그 역시 인천출신 수재들이 거쳐간 인중·제고, 서울대 코스를 밟았다. 현재 그는 목포대 문화인류학과 교수로 있다. 지금까지 일구어낸 연구 성과를 비쳐볼 때 목포라는 항구도시에서 교수란 신분으로 지칠줄 모르는 탐구에 몰입하고 있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럽다.

인터뷰 요청을 하자 “하는 일이 별로 없는데 도저히 귀경할 시간이 안난다”며 난색을 표한다. 그를 만나러 광주로 날아갔다.

▲섬문화와 항구도시 민중생활사

“관심을 갖는 것이 문화도시, 특히 생태도시를 형성하는데 사람들의 가치가 어떻게 변화하는 가를 풀어내는 겁니다. 대상이 바다 연안이에요. 더불어 농촌의 생태공동체에 관점을 두고 있습니다.” 대상으로 잡은 것이 호남을 중심으로 한 서남해지역이다.

섬문화에 대한 특성에서부터 이야기를 출발한다.
“섬은 고대사회부터 중세, 근세에 이르기까지 중앙집권적인 권력이 미치지 않는 지역이었습니다. 또 다른 측면에서 육지로부터 격리돼 있다는 환경이 내부자원으로 생존해야하는 절박성을 만들죠. 이 두줄기가 섬문화를 만드는 데 중요한 영향을 미칩니다.”

조 교수는 서남해안의 지리적 특성에 주목한다. 식물분포상 온대활엽수림대가 가장 넓게 퍼진 지역이다보니 생물종이 무한정하다. 또한 리아스식 해안과 갯벌이 발달, 바닷가 염생식물들이 군락을 이루고 있다. 이는 연안의 섬에도 영향을 미쳐 갯벌을 포함한 복합생태계를 갖게 한다.

“따라서 섬사람들은 생존을 위해 다양한 생태를 이용합니다. 내 관심사가 이지점에 머무르죠. 즉 생태학적 다양성속에서 만들어지는 문화다양성이 무엇인가 보는겁니다.”

목포이야기로 넘어간다.
일제는 목포를 물자를 나누는 거점도시로 개발했다. 부산의 부두노동자들이 점차 유입, 한 계층을 형성해간다. 한편으로는 급속한 도시화를 거치면서 영산강 일대에 농토를 기반으로 권륜을 쌓아오던 주변의 세족들이 몰려들어 또다른 계층을 이룬다. 뒤늦게 상인이 늘어나면서 서민층이 형성, 대중문화가 만들어진다.

“항구라는 조건에서 형성된 민중생활사가 있습니다. 유랑극단이 몰려오고, 그림에 시쓰는 이들이 늘어나면서 예향도시의 기반이 마련됩니다.”

조 교수는 글로 쓰여진 역사에서 배제 된 민중들의 살아온 이야기에 주목한다. 그를 주축으로 목포대, 영남대, 전북대 등은 연구단을 만들어 ‘20세기 민중생활사 연구’를 시작한다. 2002년도 일이다. 의·식·주 등 생활물품을 들여다보고 그림과 사진집, 영상집을 묵는가 하면, 문학작품을 연구하는 등 다면적으로 들여다보기를 시도한다.

연구위원장으로 학술계획에 대한 전반적인 책임을 수행해 나갔다. 지난해말 2005년까지 1차년도 연구를 마치고 보고서를 냈다. 올들어 향후 3년간 2차년도 연구를 진행중이다.

“주로 섬과 항구일대에 대한 연구죠. 인천을 포함, 군산, 목포, 구룡포까지 흝었습니다. 더해서 강하구에서 바다로 이어지는 지역의 민중생활사를 정리했습니다.”

▲관심의 출발은 유년시절 인천

평생을 농민으로 일컬어지는 민중과 갯벌에 관심을 갖게 된 근원은 유년시절에 있다. 어릴적 기억은 주안염전과 갯골, 과수원과 닿는다.

“조부 대부터 주안염전 옆에서 과수원을 했습니다. 집이 도화동이라 방과후엔 경인선 철길을 따라 과수원으로 걸어가 놀았습니다. 여름엔 더우면 주안염전에서 수영을 하거나 인근 갯벌에서 갯지렁이를 잡곤 했죠. 남인천역 낙섬까지 갈 때도 있어요. 협괴열차를 타고 고잔으로 가서 갯벌을 누비는 겁니다. 기억속에는 소래포구와 배도 있습니다.”

농과대학을 선택한 것은 그에게 당연한 귀결이었다. 부친 역시 농대 경제학과 출신이다보니 농업의 중요성을 귀에 박히도록 들어왔던 터다.

대학에 입학하고보니 그가 생각하는 농업과 학문적인 접근은 달랐다. 농민을 만나고 농사를 짓는 것에 관심이 있는 그에 반해 상아탑안에서는 과학으로 연구할 것을 강요했다.

그때 그를 사로잡은 것이 서울대 농과대 풍물패 ‘두레’다. “대학가 문화운동의 한 조류로 풍물의 시조가 된 것이 ‘두레’입니다. 전국 곳곳을 누비며 말 그대로 민속예술답사를 다녔죠. 농촌공동체에 대한 의식도 이때 싹텄습니다. 더불어 인천에서는 친구들과 은율탈춤의 대가 양소운 선생께 탈춤을 배웠습니다.”

대학 졸업후 2년은 가업을 도우며 마당극과 풍물패를 지원한다. 내내 화두는 ‘농업과 문화를 묶을 수 있는 공부가 과연 무엇인가’ 였다.

“답을 인류학에서 찾았습니다. 풍물이란 무대예술처럼 독립된 장르가 아니라 촌락공동체 활동으로 삶속에 묻혀있다는다 데 주목했어요. 이 삶의 양식을 이야기하는 것이 인류학입니다. 인류학에서 문화란 그시대 사회라는 그릇속에 담겨있는 삶의 패턴이라고 할 수 있죠.” 서울대 대학원 인류학과에 진학한다.

▲ 민속학, 그리고 생명공동체

이때부터 발품을 팔아 전국 곳곳을 밟기 시작한다. 농·어촌의 생태현장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이 대상이다. 풍물이 있는 곳은 어디든지 갔다. 일과 놀이를 어떻게 결합시키는 살폈다. “충청, 전라도, 특히 전북의 군이란 군은 모두 다녔어요. 쓰러져가는 집에 사는 유랑예인 풍물꾼을 만나기도 하고 부안장터에선 유랑극단을 만나기도 했죠. 정말 신나게 돌아다녔습니다.”

인연이란 묘한것이다. 대학원 졸업후 유학을 준비하던 그에게 목포대 인류학과 민속문학 시간강사 제의가 들어왔다. 교수의 강권에 밀려 강단에 섰을 때 만도 ‘임시’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아직도 그자리에 머물고 있다.

“제일처음 학생들과 나선 것이 진도지역 농촌에서의 동제와 의례, 무속, 생활도구에 이르는 종합조사였죠. 이어 다도해, 해남까지 영역을 넓히다보니 배우는 것이 많았습니다. 1990년 덜컥 전임교수가 됐죠. 그만 눌러앉은 겁니다.”

그의 또다른 관심사가 생명공동체다. 그 실천중 하나가 새만금생명학회 결성이었다. 2002년 결성당시 대안분과위원장을 맡는다. 방조제를 만들지 않고 대안사회문화를 어떻게 만들것인가 고민하는 일이 그에게 주어진 것이다.

세계 람사회의에서 새만금문제를 주제로 심포지엄을 가졌고 세계NGO대회에서 새만금 개발중지 선언문을 발표하는 등 일련의 일들이 진행된다.

“결국은 간척지 조성으로 결론났지만 이제부턴 주민 삶의 새로운 방식을 찾는 일에 나설 계획입니다.”

▲에필로그-인천을 위해

조 교수는 인천에 대한 전반적인 지역조사·연구가 이루어져야 한다고 지적한다.
“무엇이 인천을 형성해왔나 들여다보기 위한 작업입니다. 근현대사를 겪으며 상처받고 봉합되는 변모를 거쳐왔지요. 그속에서 속절없이 묻혀진 민중의 모습과 목소리를 찾아내야 합니다.”

더불어 현재 진행되고 있는 투자유치를 위한 경제발전이라는 거대담론적인 발전만을 볼 것이 아니라 누구를 위한 것인가 자신의 삶의 성찰이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외부에서 이식된, 발전을 위한 분홍빛 문화가 최상급이라는 사고에서 탈피해야 한다는 겁니다. 개발을 중심에 두다보면 지역주민이 변두리로 밀려날 수 밖에 없기 때문입니다.”

화두를 ‘시민사회로서의 문화’에서 찾아야 한다고 제안한다. 문제를 제기하는데서 실마리를 풀어야 한다고 답을 던진다.

“의식있는 이들이 모여 브레인 집단으로서 역할을 해야합니다. 변환기 대안사회를 이끄는 인천이라는 이름을 걸고 순수한 기구로 첫발을 떼는 겁니다. 소수자의 출발이지만 이 씨앗이 때가 되면 사회전반으로 퍼져나가게 됩니다.”
김경수기자 ks@i-toda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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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경만은…
▲1954년 인천출생 ▲제물포고등학교 졸업 ▲서울대학교 농과대학 졸업 ▲서울대학교 대학원 인류학과에서 박사학위(생태인류학) ▲현재 목포대학교 문화인류학과 교수, 유네스코 인간과 생물권 위원회(MAB) 위원 ▲새만금생명학회 대안분과위원장 역임 ▲캐나다 브리티시 컬럼비아대학 지속가능발전연구소 객원교수 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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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주에 만날 사람/황선진 마리학교 교장

내가아는 황선진은…

우리 전통사상에서 문화방향을 찾으려는 모색을 끊임없이 해온 사람입니다.
70년대 인천의 민주화운동과 문화운동을 결합한 주역이기도 하구요. 대학시절 깊은 인연이 만들어졌죠.
비제도권에서 줄곧 자유스럽고 창조적이며 생명과 이웃에 바탕을 둔 교육을 실천해왔습니다. 현재 강화에서 일구고 있는 대안학교도 그 실천의 연장선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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