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묵은 정의는 무엇인가라는 논쟁을 다시 불러내고 싶은 생각은 없다. 마이클 샌델 같이 이런 끝나지 않을 주제로 재미를 보는 사람들도 많겠지만 이제 내게 있어 이러한 논쟁은 오직 진부하고 한가하게만 여겨져서다.

내게 있어 정의란 인간들이 필요에 의해 만들어내고 다시 그에 스스로 신념을 바쳐 충성하는 임기적 대상일 뿐 영속하는 실체는 아니다. 홍경래나 만적, 임꺽정이 옳았는지 그들을 제압한 당시의 조정이 옳았는지에 대해 영원하고 객관적인 답이 있을 수는 없지 않겠나.

인간들이 정의라는 신념을 만들어내는 과정조차 별로 신통한 방법은 없는 것이어서 오라클(oracle) 따위 샤먼(shaman)들에게 신탁을 받거나 종교적인 가르침에 의탁하는 것이 고작이었다. 플라톤과 아리스토텔레스가 제아무리 엄밀한 논리를 전개해 보았자 결국 인간세계에 실현가능한 정의의 세계는 인간의 역사 밖에서 성립하는 것이 아니다.

르네상스 이후라고 해도 천부인권론 같이 결국 종교적인 범주를 탈피하지 못하였거나 착취론 같이 편협하고 부정확한 인간의 언어를 이용한 추론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였다. 동양이라고 해서 사정이 다른 것도 아니어서 유가와 도가, 법가의 논쟁을 살피다보면 그 상충과 괴리의 심각함으로 인해 상념이 갈래를 잃고 방황하기가 십상이다.

이와 같이 인간의 정의라는 것이 시간과 장소, 담기는 그릇을 따라 변화하는 물과 같은 모습인 것이고, 인간의 역사라는 것은 그러한 부정형의 논리에 따라 만들어진 문화적인 현상의 기록인 것이라서 아마도 “역사는 현재와 과거의 대화다”라는 은유적인 명제가 성립하는 것일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내가 정의를 전면적으로 부인하는 허무주의자는 물론 아니다. 아무리 인간의 불완전한 언어를 가지고 정의(正義)를 정의(定義)하기 어렵다할지라도 역시 정의는 한 사회의 방향타와 같은 것이거니와 그 존재조차 부인하고 나서야 어찌 사회를 구성할 수 있을 것인가.

어떤 경우에도 남의 신체와 재물을 정당한 이유 없이 상해하거나 절취하는 것이 정당할 수는 없는 일이고, 사회(社會)라는 정의(定義)를 사용하는 한, 남의 이야기를 덮어놓고 윽박지르고 자신의 논리만을 강요하여 권위와 이익을 독점하는 행위는 용납되지 않는다. 구성원들이 선의적(善意的)으로 지향하는 공동의 목표로서 정의를 소유하지 않는 사회는 사회로서 의미를 가지지 못하는 것이다.

다만, 나는, 인간이라는 존재의 상대성과 유한성, 그들이 사용하는 언어와 추론의 도구들이 갖는 불완전성과 임시성을 고려할 때 절대와 영원이라는 가치관의 무리한 강요는 사회라고 하는 집단적인 삶의 형태를 위협하며 개개 인간의 행복의 추구를 심각하게 방해할 우려가 있다는 현실적인 문제에 주목하는 것이다.

요컨대, 인류의 역사가 지속하는 한, 마치 유행처럼 명멸하는 어떠한 형태의 이데올로기라고 하더라도 그것은 바람처럼 왔다가 바람처럼 사라져가야 하는 것이다. 적어도 인류의 다양한 미래의 삶이 보장되어야 한다는 것이 사실이라면, 이 땅에 아직 오지 않은 미래의 인류의 삶까지를 미리 규정하고 지배하는 권능을 오늘, 우리가 독점하려고 해야 할 이유는 없는 것이 아닌가.

또 다시 선거를 앞두고 동분서주하는 소위 시민운동단체들의 발걸음을 바라보는 심정이 착잡하다. 지난 세월 결국 그들이 보여준 것은 권력과의 유착이며 자신들의 현실적인 이익의 추구이었다는 비판에 대하여 단 한마디 변명도 없이, 위장된 정치권력으로서의 행보에 대한 단 한 번의 진지한 성찰도 없이, “나=정의”라는 단순 함수식을 연장하려는 시도들이 백일하에 진행된다. 보기에 민망하다.

자신이 알고 있다는 것이 사실인지조차 검증하려하지 않고 자신이 내세우는 가치라는 것이 무엇인지 설명조차 하지 않는 “비객관적이고 비타협적인 자신만의 정의”를 우리는 “독재”라고 부른다. 그리고 그러한 독재가 스스로를 민주라고 부를 때 이 사회는 절망에 빠진다.

적어도 시민운동을 한다는 사람들에게는 그러한 운동을 통해 자신이 얻은 권력과 이익의 크기보다 이 사회가 얻은 이익이 더 크다는 사실에 대해 책임 있게 설명할 수 있도록 언제나 빈틈없이 성찰하여야 할 사회적인 의무가 있다. 자칫 무질서에 빠지기 쉬운 민주사회에서 아무나 “안다”라고 주장하고 아무나 아무 자리를 담임하는 것을 견제하기 위해 시민운동의 역할은 강조된다.

선거와 세월호 사건조차 진영(陣營)을 확대하기 위한 기회로 활용하려는 미련한 시도가 있다는 얘기를 듣는다. 이를 경계한다. /하석용 공존회의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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