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창한 일요일에도 출근하는 맞벌이 아내를 출근시켜 주기 위하여 녹차 한 잔을 들고서 차 옆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 때 무언가 자꾸만 부르는 듯한 느낌에 어슬렁 다가가 보니, 집 앞 담장 위에 늘어져 은빛 머리칼을 살랑대는 라일락 꽃나무였다.

아하! 여기에 오월이 있었구나.

성큼 성큼 다가오는 유월의 기세에 다소 푸석해졌지만, 뭇 꽃향기들을 억누른 발군의 시화(詩花) 답구나.

금세 환장해 버릴 것 같은 라일락 꽃향기에서 열 걸음 정도 물러나 움츠리고 있던 녹차 향을 다시 불러냈다.

미미한 풀잎 향이 시나브로 목동을 찾은 어린 양처럼 온순히 다가온다. 아! 라일락은 그리움과 살포시 숨겨진 열정의 표상이다.

아름다운 자태에 묻어나는 유혹의 향기는 남자의 마음에 바람이 불 때, 미묘한 경계를 허무는 무모한 용기를 북돋운다. 그래서 라일락 향기는 열 걸음 정도 물러나서 음미할 일이다.

휴일이라 교통소통은 원활했다. 아내의 직장이 가까워질 즈음, 말없이 앞만 보고 있는 아내의 얼굴을 얼핏 보니 귓불 주변에 흰 머리카락 몇 올이 눈에 들어왔다.

뭉클 치솟는 애잔한 마음에 지쳐 보이는 아내의 어깨를 살며시 잡았다. 어눌한 목소리로 위로의 말을 건넬 수밖에. 미안해. 무능한 남편 탓이야. 언젠간 편안한 날이 오겠지….

차가 설 때까지 묵묵부답으로 앞만 보던 아내가 근무복 든 가방을 들고 내리면서 눈가에 포근한 미소를 올렸다. 괜찮아요.

애들하고 점심 잘 챙겨 드세요. 친구 만나면 술 많이 드시지 말구요…. 잠시 바라보다가 돌아서는 아내의 목덜미에서 문득 은은하면서도 익숙한 냄새가 날아왔다. 아 이건 라일락 향기다.

저만치 출입문을 들어서는 아내의 작은 어깨를 한동안 응시하다가, 나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여보! 오늘 저녁에는 당신이 좋아하는 맥주나 오붓하게 부딪칩시다.

매캐해진 콧구멍 속을 라일락 향기가 더욱 진하게 흔들었는데, 환장할 그 꽃나무로부터 다섯 걸음 정도 거리에서 맡은 정도의 향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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