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리 가본 경기장-문학경기장 ①인천도호부청사, 인천향교

 

옛 인천은 모습은 어땠을까?

아시아경기대회 수영경기가 펼쳐지는 문학경기장 내 박태환 수영장에 국내·외 많은 관람객이 끊이질 않고 있다. 박태환 선수의 마지막 투혼을 보기위해 국내 관람객들은 일찌감치 경기장을 찾았다. 중국 관광객들도 자국 선수들을 응원하기 위해 박태환 수영장 한 켠에 모여 응원을 펼쳤다.

성수씨도 아들 민준이와 수영경기가 열리고 있는 박태환 수영장을 찾았다. 비록 예선경기가 열리는 날이었지만 한국 선수들의 역영하는 모습에 박수로 응원했다.

성수씨가 박태환 수영장을 찾은 이유는 또하나 있다. 인천의 옛 모습을 엿볼 수 있는 곳을 민준이에게 소개해 주고 싶어서였다.

초등학교 4학년인 민준이는 요즘 사회시간에 내 고장 인천의 역사를 배우고 있다. 성수씨는 인천을 대표하는 문화재인 인천도호부청사와 인천향교에서 옛 인천을 느껴보기로 했다.

조선시대 인천 지방 행정을 담당했던 관청 건물이다. 지금의 시청과 같다.

인천도호부에는 당초 왕권의 상징인 객사(客舍)를 비롯해 부사의 집무처인 동헌(東軒), 내동헌(內東軒) 등 15~16동의 건물이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지금은 문학초등학교 교정에 객사와 동헌 일부만 보존돼 있었다.

성수씨네 부자는 객사들 둘러봤다. 임금의 위패(位牌)를 모시고 있는 건물로서 수령의 집무실인 동헌(東軒)보다도 격이 높았으며 그런 만큼 관아 시설 중에서 규모가 제일 크고 화려하며 전망이 가장 좋은 곳에 자리잡고 있었다. 객사는 가운데 채가 좌우채보다 한단 높은 솟을대문 형식의 독특한 지붕이 얹어 있었다.

객사 내부 공간에 부사(府使)가 임금에게 예(禮)를 올리는 장면이 모형으로 꾸며져 있었다.

객사를 지나 부사의 집무실인 동헌으로 들어섰다. 객사 동쪽에 있어 ‘동헌’이라고 불리는 곳이었다. 동헌 중앙 대청 마루에서 죄인을 추궁하고, 재판하는 부사의 위엄있는 모습이 그려졌다.

성수씨네 부자는 인천도호부청사 동쪽 400m에 있는 인천향교로 발을 돌렸다.

성균관과 더불어 우리 나라 전통 시대의 교육 중추를 맡아 수많은 인재를 양성하고 배출한 곳이 바로 향교다.

향교는 문학산을 뒤로하고, 인천 앞바다를 향해 있었다. 향교 입구 홍전문을 지나 북쪽으로 올라가니 외삼문 좌우 담장이 둘러쳐 있었다. 외삼문을 지나 중앙계단에 오르니 좌측으로 명륜당이, 우측으로는 제사에 쓰이는 도구들을 보관하는 제실이 자리하고 있었다.

성수씨는 명륜당과 제실 사이에 있는 대문 안으로 들어서서 뒤를 돌아보았다. 문학경기장의 웅장한 모습이 한눈에 들어왔다. 문학경기장 우측으로 마을 전체의 모습도 볼 수 있었다. 마을이 한 눈에 내려다 보이는 이 곳에서 옛 선조들이 학문을 닦았을 터였다.

인천도호부청사에서는 아시아경기대회에 맞춰 전통문화한마당이 열리고 있었다.

전통 연 날리기, 제기 차기, 전통 탈 써보기, 윷놀이, 널뛰기, 굴렁쇠 굴리기, 장기 및 고누, 줄넘기, 투호놀이, 지게지기, 절구공이치기, 맷돌돌리기, 다듬이질하기, 4발구르마, 팽이치기, 전통고리던지기, 전통 악기 소리 체험(장구, 북, 징, 꽹과리), 장치기, 줄타기, 우물펌프체험 등 전통민속놀이를 체험할 수 있었다. 많은 외국인들이 서툰 몸짓으로 우리나라의 민속놀이를 체험하고 있었다.

또 경단만들기, 제기만들기, 강정만들기, 연만들기 등 전통문화 체험교실도 열렸다. 한 켠에서는 고전무용 공연이 펼쳐지고 있었다.

전통혼례복을 입어 본 민준이의 모습을 보며 성수씨는 흐뭇한 미소를 머금었다.

인천도호부청사

시도유형문화재 제1호(1982년 3월 2일 지정)
인천시 남구 문학동 262

 
조선 후기의 건축물로 공자와 성현의 제사를 지내고 지방 학생들을 가르치던 향교이다. 처음 세워진 연대는 알 수 없으나 지금 남아있는 건물은 조선 후기에 지은 것으로 추정된다.

주요 건물로는 공자의 위패를 모시는 대성전, 우리나라와 중국 성현의 위패를 모신 동무와 양무, 교육생들의 강당인 명륜당, 그리고 유생들의 처소인 동재와 서재 등이 있다. 매년 봄 가을에 제사를 지내며 초하루와 보름에 분향하고 있다.

조선시대의 기본적인 지방 행정기구는 도(道)이다. 경기도의 경우, 3개의 목(牧)과 8개의 도호부(都護府), 10개 군(郡)과 12현(縣)이 있었고, 8개의 도호부 가운데 인천도호부와 부평도호부가 포함돼 있었다. 인천이 도호부로 승격된 것은 조선 세조 5년(1459)으로 세조의 비(妃)인 자성왕후 윤씨의 외향(外鄕)이기 때문이었다.

인천도호부청사의 건축 시기는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다. 다만, 객사를 보수하는 과정에서 발견된 지붕의 기와에서 ‘강희 16년’이라는 명문(銘文)이 나온 것을 볼 때 숙종 3년(1677년)에 중수된 것임을 알 수 있을 뿐이다. 인천도호부의 건물 구성은 ‘인천부읍지(仁川府邑誌)(1899)’를 통해 짐작해 볼 수 있다.

인천향교

시도유형문화재 제11호(1990년 11월 9일 지정)
인천시 남구 문학동 349-2

 
향교는 성현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며, 지방 백성들의 교육을 담당하기 위해 국가에서 세운 교육기관으로 조선시대에는 국가로부터 토지·노비·책 등을 지급받아 학생들을 가르쳤다.

인천향교가 처음 세워진 연대는 알 수 없으나 15세기 중반에 수리했다고 전한다. 지금 남아있는 주요 건물은 조선 후기에 지은 것으로 보이며, 1976년에 대성전·명륜당·삼문 등을 고쳤다. 현재 대성전·동무·서무·명륜당·동재·서재 등이 남아있다.

뒤쪽에는 제사공간을 이루는 대성전과 동무·서무가 있고, 내삼문을 경계로 앞쪽에는 교육공간인 명륜당과 학생들의 기숙사인 동재·서재가 있어, 전학후묘의 배치형식을 볼 수 있다.

향교에서는 인성 및 예절교육 등 전통문화를 가르치는 교육의 기능은 물론 성현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지내는 제사의 기능을 현재까지 이어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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