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사람이 윈스턴 처칠에게 정치가가 되기 위해서 필요한 자질이 무엇이라고 생각하는 지를 물었다.
“그것은 내일, 다음 주, 다음 달, 그리고 내년에 무슨 일이 일어날 것인가를 예언하는 재능이지요.”라고 처칠은 답을 했다. 그리고 잠시 말을 끊었다가, “그리고 뒷날 그 예언이 맞지 않았던 이유를 그럴듯하게 설명할 수 있어야 하는 거예요.”라고 매듭을 지었다.

옛 소련의 한 시대를 풍미했던 서기장 흐루시초프는 “결국 정치가들이란 강이 없어도 다리를 놓겠다고 공언하는 부류들이다”라고 정치인에 대한 조롱을 남기기도 했다. 처칠이나 흐루시초프의 이런 일화들을 되새기면서 인천의 전 현직 시장들을 비롯해 우리 주변의 정치인들을 생각한다. 혹시 처칠이나 흐루시초프가 그들을 만날 기회가 있었던 것일까?

정치인, 표만 바라봐야 하는 직업적 숙명

자고로 식자(識者)들이 남긴 정치나 정치인에 대한 풍자 중에서 가시 돋지 않은 표현을 찾기가 어렵다. 특히 민주주의라는 제도 하의 정치인들에 대한 경우가 더욱 그렇다. 그들이 그렇게 허풍스럽고 무책임하며 비현실적인 인격으로 묘사되는 데에는 당연히 많은 이유가 있을 것이다.

변덕스런 표(票)만을 바라보며 살아야 하는 그들의 직업적인 숙명 탓일 수도 있고, 스스로 감당하기에 버겁게 배당된 거대한 권력이 여러 가지 인격적인 왜곡을 일으킬 수도 있을 것이다. 어쩌면 천성적으로 그런 성품을 타고 나야만 정치인이 될 수 있는 것일 수도 있겠고…, 아무튼 그들이 일반적인 평범한 시민들과 많이 다르다는 것만은 분명해 보인다.

자아도취형 정치인에게 무엇을 기대하나

나는 그들의 그러한 특징들 중에서 “일반적으로 그들은 반성할 줄 모른다”라는 사실에 특히 주목한다. 물론 그들도 선거에 지고 나면 국민의 뜻을 겸허하게 받아들인다고 성명을 발표하거나 땅바닥에 엎드려 사죄하는 쇼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나는 역대 대통령들의 대국민 사과까지를 포함해서 그들이 사과를 통해 진정한 반성의 전환을 하는 것인지를 의심한다. 그러한 공식적인 의례가 끝나고 나면 그들은 지체 없이 다시 제자리로 돌아가곤 했던 것이다. 아마도 그들에게 있어 자신의 과오를 인정하는 반성과 사과는 정치인이기를 포기하는 행위 정도로 생각되는 것이 아닌가 싶다.

사실 사회가 아직 어둡던 시절에 이러한 정치인들의 허세와 거드름, 과대망상과 고집은 통 큰 지도력과 선각으로 예우를 받기도 했고 불굴의 의지로 미화되기도 했다. 오히려, 큰살림을 맡는 정치인은 그런 뚝심을 가져야 한다고 부추김을 받기까지도 했다.

그러나 이제 세상은 사회를 움직이는 권력이 미세하게 분화하고 사회가 지향하는 목표를 누군가 소수가 독점하지 못한다.

기술의 진화가 인간의 삶의 형태를 어떻게 하루아침에 바꾸어 놓을지 알 수 없고, 급속하게 가까워지는 개인과 개인, 집단과 집단 간의 의사교류의 간격이 일찍이 인류가 경험하지 못했던 어떤 사상적인 분기점을 만들어 내게 될지 예측하기 어렵다.

이런 변화 속에서 오직 우리 정치인들만이 처칠과 흐루시초프 시대의 풍자 속에 머물고 있다면 그것은 이 사회와 정치인 양쪽 모두에게 비극이 아닐 수 없다. 정치인들이 좀 더 전문적이고 행정적이며 과학적이지 않는 한 그들에게 사회의 살림을 맡길 수 없는 시대가 도래하고 있는 것이다.

무릇 생명가진 사물들의 진화는 오직 뼈를 깎는 성찰의 결과다. 이제 스스로를 성찰하지 못하고 스스로 진화하지 못하는 자아도취형의 정치인들이 이 사회를 위하여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자기변명과 자아도취로 가득한 유사(類似) 회고록을 앞세워서 여전히 세상을 자신들이 이끌고 가르쳐야만 하는 대상으로 인식하는 정치인들에게서 오늘 이 세상이 기대할 수 있는 것이 무엇일 것인가.

자신들이 지천으로 뿌려놓은 과오들 조차 자신의 치적으로 밖에는 보이지 않는 꺼풀 씌운 눈으로 그들은 과연 누구의 어떤 마부(馬夫)가 될 수 있을 것인가.

그들이 바뀌지 않는다면 시민이 바꿀 수 밖에

잘난 시정(市政)의 공과(功過)를 놓고 멱살잡이를 하는 전 현직 인천시장들의 공방에 말문이 막힌다. 그들에게 스스로를 냉정하게 성찰할 수 있는 인격이 남아있다면 어떻게 “한 번 더”를 이야기 할 수 있는 것인가. 이미 보여줄 것 다 보여준 마당에 “다시 한 번 더” 그래봐야 하는 또 다른 근거는 무엇인가. 이 도시는 왜 무엇을 위해 언제까지 그들의 비과학적인 야심을 실험하는 도구가 되어야 하는가. 민주주의의 마지막 희망은 정치인들의 권력을 회수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들이 바뀌지 않는다면 시민들이 그들을 바꿀 수 밖에 없는 것이 아닌가. /하석용 공존회의 대표

 

저작권자 © 인천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