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흥철은 표현적 공교함을 얻고자 대상에 심취하고 이를 쉼 없이 관찰하며, 여행을 통하여 견문을 넓히고 이를 흉중에 포착하여 그림으로 담아내 온 화가다.

대상에 관한 그의 집요한 관심은 여백보다는 형상에, 선보다는 면에, 준보다는 질감에 무게가 실린 독특한 한국화를 생성시켰다.

이런 점은 교과서적인 한국화와는 다른 그만의 색깔이고 캐릭터라고 볼 수 있다.

무르익지 않은 선묘로 대상을 요추하는 것은 마치 동자승의 선문답처럼 어설퍼 보일 수 있다.

이에 반해 황흥철은 주변의 세태에 아랑곳하지 않고 자신의 관심거리와 표현 언어에 천착해나가는 작업실의 화가인 것이다.

한편 황흥철의 그림은 한국화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기암괴석이나 명승고적, 또는 기념비적인 대상들과는 관계가 없다.

그저 주변 어디를 가나 볼 수 있는 야산이 그의 작품의 제재이며, 지붕에 쌓인 흰눈의 무게가 버거운 듯 축 늘어진 산가(山家)와 눈 맞은 나목(裸木)이 겨울의 정취를 배가시킬 뿐이다.

물론 그의 그림은 위와 같은 천편일률적인 제재와 구성으로 이루어진 것만은 아니다.

그의 20년 가까운 화단역정 속에는 소래포구와 여기에 의지하여 지난하고 치열한 삶을 영위하는 사람들, 그리고 바닷물에 의해 침식된 폐선과 나문재가 뒤엉켜 인고의 세월을 말해주는 갯벌 등 수많은 사실들이 녹아있다.

이것은 우리와 동떨어진 먼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 주변의 이야기이고 우리 이웃의 이야기이자 바로 우리의 이야기이다.

근래에 이르러 황흥철은 종래의 자연과 인간의 건강한 정서에 뿌리를 둔 밝은 서정보다는 그 이면에 보이는 황량함과 ‘표현의 현대적 형식미’에 치중하는 느낌이다.

여기에서 현대적 형식미라 함은 시방식(視方式)의 엄격성과 대상의 재현방식의 합리성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는 그림에서 여러 시각이 한 화면에 공존하는 것을 철저히 배제하면서 마치 카메라의 표준렌즈가 포착한 것처럼 원근법적인 공간구성을 선호한다.

아울러 운무나 공기원근법의 과장된 적용을 회피하고 마치 인상파화가들이 했던 방식처럼 빛의 이동과 이에 따른 형태의 변화에 주목하면서 극명한 자연의 세계에 주목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함으로서 양화 특유의 심원법적 깊이와 여백미를 잃어버렸을지 몰라도, 풍경의 실재감 내지는 현장감을 두드러지게 살려내고 있다.

결국 황흥철은 화가로서의 자세와 마음가짐은 곽희를 따르되 표현형식은 철저하게 그를 배척하는 셈이 된다.

오늘날 미술판에서 살아남기 위한 방법적 수단으로 파격과 개성을 드러내는 것이 지름길인줄 알면서도 이미 중진작가의 대열에 올라선 황흥철이 묵묵히 수묵산수의 전통 안에서 행로를 모색하는 일이 쉬운 일이 아닐 것이다.

그러나 필자는 그의 이러한 지구력이 내밀한 경지로 살아나서 종국에는 꾸준히 법도를 지켜간 사람만이 얻을 수 있는 ‘어떤 것’이 있을 것이라는 믿음을 갖고 있다.

이는 막연한 기대내지는 바람이 아니다. 왜냐하면 이것은 필자의 주변에서 흔히 본 경험에 의거한 사례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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