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물패 ‘더늠’은 지난 90년 초 결성 이후 풍물을 매개로 인천노동문화운동을 이끌어왔다.

그 세월동안 수많은 노동자 풍물패를 조직하고 강습했는가 하면, 지역에서 처음으로 풍물 대동굿판을 만들어 냈다.

상근 활동가로 ‘더늠’을 지켜온 이찬영이 있기에 가능했다. 십수년동안 한손엔 꽹과리를 들고 인천의 노동문화판을 성큼성큼 걸어다닌 그다.

“이들이 벌여놓은 판에 갔더니 풍물만 하는 것이 아니라 이야기를 하더라. FTA를 반대하고, 평택 미군기지를 반대하고…. 진정한 이야기를 만날 수 있는 장을 만들고 싶습니다.”

그러기 위해 스스로는 움직이지 않고 굳건히 자리를 지키는 산이 되고 싶다고 말한다.

이찬영의 대학생활은 온통 풍물로 점철돼 있다. 스무살에 잡은 꽹과리는 그의 삶을 통째로 바꾸어 놓았다.

“풍물서클에 들어가면 선배들이 술도 잘 사주고 놀기 좋아한다고 해서 입학하자마자 찾아갔죠. 민주화운동이 정점에 달했던 시기였습니다. 강경대 열사 정국이었거든요. 풍물서클은 외부 민중연대 기운과 자연스레 연대됐습니다.”

열심히 풍물 치러 학교에 갔다. 분신 소식이 연이어 들려왔다. 2학년 말 단과대학 풍물서클이 모여 ‘인하대 풍물패 연합’을 결성한다.

대표를 맡았다. 그 다음해엔 운동성향을 가진 동아리가 뭉쳐 ‘인하대 문화예술운동연합’을 띄웠다. 중심에 선 그다. 의장으로 이들을 이끌어 갔다.

학내와 병행, 외부 활동을 했다. 당시 노동현장 활동가들이 결성한 인천민중문화예술운동연합(인문연)에 회원으로 가입, 현장에서 풍물운동을 펼쳐나갔다.



“1992년 인문연에서 풍물을 치던 선배들이 노동자들의 문화공간 ‘더늠’을 만들죠. 나는 학생대표자 자격으로 풍물 잘하는 동료와 후배 10여명을 모아 들어갔습니다.” 이후 ‘더늠’은 그의 삶의 중심이 됐다.

4학년이 되면서 ‘이제 학생운동은 할 만큼 했다’고 스스로를 정리한다. 군입대를 택했다.

“오히려 이때부터 노동문화예술운동에 적극 나섰습니다. 오전에 출근했다 밤에 퇴근하는 단기사병 신분이었거든요. 밤마다 노동자 강습이다 현장공연 기획이다 쉴 틈없이 동분서주했습니다. 잠은 하루 서너시간으로 줄였어요. 발각되면 당연히 구속감이었죠.”

차츰 선배들이 자기영역을 찾아 흩어졌다. 실질적으로 공간을 꾸려야 하는 역할이 그에게 주어진 것이다.

“‘더늠’의 방향성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했습니다. 선배들이 떠난 상황이므로 이제 풍물 전문가 섹트는 버리고 노동자를 지원하는데 치중하자는 쪽으로 선택했지요.”

명칭을 ‘노동자풍물패 더늠’으로 바꾼다. 대우자동차, 아남정공, 동우전기 등 제조업과 금속사업장을 중심으로 열심히 강습을 나갔다.

한편으로는 노동자 풍물패 연합모임을 만들었다. “지역내 노동자 풍물패들을 결속시키는 실질적인 축을 ‘더늠’이 자임한 셈이죠.”

민노총이 결성되고 96·97총파업투쟁이 일자 본부 노조상황실에 들어가 기획을 맡는다. 이어 전국의 노래패, 마당극단, 풍물단, 노동자문학회 등 노동문화운동 단체들 모임체 ‘전국 노동자문화운동단체 대표자회의’ 결성을 주도한다.

“노동자문화를 중심에 세워 독립적인 운동을 전개하자는 의지가 뭉쳐진 겁니다. 이전의 노조 지원 활동에서 적극적인 문화운동을 펼치자는 합의입니다.”

그 사이 대학을 졸업했다. 상근하면서 더늠을 이끌어갔다. 여전히 노조 사업장을 중심으로 풍물패를 조직해나갔다. 몇년이 훌쩍 지나갔다.

“어느덧 21세기가 됐습니다. 그런데 더늠의 지위가 달라져 있는 겁니다. 90년대에는 지역 시민사회단체로부터 인정을 받았거든요. 그런데 노동자쪽으로 (문화운동을) 치중하다보니 오히려 고립돼 있었습니다.”

주위를 둘러보니 다른 풍물단들은 자체 예술단을 운영하는 한편, 시민에게 문을 열어놓고 있었다.

대중운동으로 전환이 필요했다. 명칭도 ‘노동’을 떼고 ‘풍물패 더늠’으로 바꿨다.

“풍물을 가르치면서 줄곧 노동문화활동가를 키우고 싶었습니다. 그것이 우선이었지요. 이제부턴 회원들과 함께하는 사업들을 늘려나가는 것이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더늠지기로 모임을 이끌면서 특별히 공들였던 것이 창작공연이다.

출범 5년이 되는 해부터 정기공연을 시작, 풍물 창작 무대를 연다.

“회원들이 주축이 돼고 배움을 쌓고 있는 이들이 참여해 창작물을 만들어 내자는 것이 기획의도 였습니다. 판을 펼치는 공간은 야외마당이지요.” 그 후 5년동안 매년 정기공연에서 창작물을 선보였다.

“회원들마다 생의 주기가 있어요. 주기의 변화에 따라 단체활동 결합도가 달라지지요. 갈수록 새로운 작품을 만들기 위한 더 많은 시간이 요구됐으나 모두가 하나가 돼 전념하는 것이 점점 더 힘들어졌습니다. 창작공연에 대한 욕심을 버리자는 결심을 했습니다.”

풍물굿으로 넘어간다. 풍물은 그대로 중심에 두면서 지향하는 생각들은 만장에 써 걸고 여기에 대동놀이를 결합했다.

“풍물이 단지 기예적인 것을 보여주는 것에서 머물러서는 안됩니다. 대중의 삶속으로 들어가야 해요. 무엇보다 노동자 풍물굿을 만들고 싶었습니다. 포괄적인 진보나 민중의 개념이라기보다는 노동으로부터 나오는 굿을 일구는 겁니다.”

그의 구상에 맞춰 달짚이라도 태우려면 큰 마당이 필요했다. 관으로부터 허가를 받는 것이 애당초 불가능한 듯 보였다.

드디어 지난해 소원을 푼다.

거리에서 풍물을 매개로 굿판을 벌인 것이다. 주안5공단 한일레미콘 사업장에서 정기공연 ‘살어리 살어리 해방세상 살어리’ 깃발을 당당히 올렸다.

“노사가 장기간 싸움을 하고 있는 사업장이었어요. 노조와 협의해 공장안에서 공연을 올리기로 했는데 사업주가 일방적으로 문을 걸어잠갔습니다. 밖으로 나갔습니다. 공단 거리에서 굿판을 벌였죠. ‘더늠’과 ‘인천지역 노동자풍물패연대모임’이 함께 참여했습니다.”

행사를 마치자 성공한 대동굿이라는 평가가 돌아왔다.

스무살에 시작한 풍물을 15년동안 한시도 놓지 않고 살아온 그다. 문화운동판에서 어설프게 시작한 것이 아니라 전통적으로 풍물한 이들에게 제대로 배웠다. 운이 좋았다고 말한다. 실력만큼은 자신있다.

“문화운동을 하면서 풍물을 치는 사람으론 우리가 마지막 세대가 될 것 같습니다. 이제는 풍물을 전공과목으로 택해 대학에 가고 있으니 말입니다. 개인적으론 어떤 형태든 풍물을 업으로 하는 친구들이 많이 생겼으면 합니다. 공연을 통해 또 다른 가치를 창조해낼 수 있을 테니까요.”

인천에 예술대학이 생기고 연희과도 들여 풍물이 활성화되기를 바란다고 툭 던진다.

‘더늠’이야기로 넘어간다. “더 개방해야 하는 것이 과제입니다. 장르도 열고 사람도 열고, 동시에 우리 색깔은 더욱 확실하게 보여주어야 합니다.”

‘더늠’ 회원들은 노동자 가치관을 존중하는 사람들이라고 정의한다.
“사람이 사람답게 사는 사회를 만들려고 늘 고민합니다. 우리가 문화운동의 중심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다만 중요한 단위로 여기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각자는 또 다른 단위에 가서 네트워크를 만들고 ‘더늠’이 지향하는 바를 공유합니다. 그러므로 ‘더늠’ 안에 더 많은 사람이 있어야 합니다.”

그와 ‘더늠’의 경계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순간 그의 질량감과 부피감이 나이를 훌쩍 뛰어넘어 한없이 크게 다가온다.



이찬영은…

▲1972년 충북 제천 출생
▲1991년 인하대학교 법정대학 법학과 입학
▲1992년 노동자문화공간 ‘더늠’에 학생 대표자 자격으로 10여명을 이끌고 입단
▲1993년 ‘인하대 풍물패 연합’ 대표
▲1994년 ‘인하대 문화예술운동연합’ 의장
▲1998년 ‘전국노동자 문화운동단체 대표자회의’ 결성 참가
▲1998년 인하대 법학과 졸업, ‘더늠’ 상근활동가로
▲1998년 ‘더늠’ 정기공연 ‘살어리 살어리 해방세상 살어리’ 시작
▲1999년 인천민예총 굿위원회 사무국장(~현재)
▲2002년 ‘더늠’ 10주년 기념 판굿 공연
▲2006년 인천노동문화제 조직위원회 기획단장

김경수기자 ks@i-today.co.kr·사진=김성중기자 jung@i-toda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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