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리 해고에서 복직 그리고 40년의 희망을 찾은 오원식씨 이야기” -
“40년의 희망을 찾은 기술자 오원식씨”
“지금은 가족의 희망을 쏜다”

“4년의 세월을 잃었지만 40년의 희망을 얻었습니다.” 15년 다니던 대우자동차에서 정리해고를 당하고 지난해에 GM대우자동차 부평공장에 복직한지 1년이 지난 오원식씨(48)가 어두웠던 과거와 시간을 돌이키며 밝힌 고백이다.



졸지에 해고자가 되었던 오씨는 힘들게 중소기업에 취직해 상처투성이가 된 마음을 추스려 가던 지난 2002년 12월 GM대우자동차의 복직 제의를 거부했었다.

자신을 험한 세상의 나락으로 내다버린 대우차에 대한 서운함을 털어 버리지 못한데다 가슴 한구석에 맺힌 응어리가 풀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렵게 자리잡은 중소기업에서 자신의 가치를 인정받았고 상사의 끈질긴 만류를 뿌리치지 못한 탓으로 1년을 그저 그렇게 보냈다.

그러나 자신보다 먼저 복직한 동료의 “돌아와서 실력도 보여주고 멋지게 살아보자”는 권유는 마음을 흔들었다.

결국 오씨는 망설이다 아내와 상의도 없이 직접 자기발로 GM대우자동차 노동조합을 찾아가 복직을 신청했다.

결국 해직 4년여만인 지난 2005년 12월15일 GM대우자동차 부평공장으로 돌아온 것이다. 해고의 아픔을 견디어 내고 GM대우자동차 부평공장으로 출근하는 오씨의 요즘 표정은 한층 밝아졌다.

오씨는 가슴에 특별히 각인된 숫자를 기억하고 있다. ‘20010219’. 대우차에서 해고를 당한 2001년 2월19일.

처음에는 밝은 표정으로 말을 이어가던 오씨가 문득 정리해고일에 대한 기억을 더듬더니 울먹였다.

서러웠던 아픈 기억이 떠올랐던 모양이다. 곁에 앉아있던 아내 박사신(44)씨가 “아직도 흘릴 눈물이 남았어요?”라는 핀잔과 함께 “애 아빠가 본성이 착해선지 아직도 감수성이 예민하다”며 어색한 분위기를 추스렸다.

분위기를 바꿔 보려던 아내도 남편의 얼굴을 쳐다보더니 소매 끝으로 눈물을 훔쳤다.

“2001년 2월 19일은 지옥에 떨어진 날”이라며 오씨가 말을 이어 나갔다.

아내와 함께 집에 있는데 우체부가 찾아와 말은 못하고 우물우물 하더란다.

우체부도 매스컴을 통해 대우자동차의 정리해고에 대해 알고 있었는지 말을 못하고 해고통지서를 놓고 가더라는 것.

마른 하늘에 날벼락 같은 해고통지서를 받아든 오씨는 억누를 수 없는 좌절감을 느껴야 했다.

그를 잘 아는 지인들이 “다른 사람은 잘려도 당신은 아니다”라고 했었기에 통지서를 받고나니 배신감에 분노가 더 컸다고 말한다.

설움과 함께 앞이 막막해서 안방에서 이불을 덮고 쓴 채 울기도 수 차례. 술을 아무리 퍼 마셔도 취하지 않았고 오히려 정신만 말짱하고 잠도 오지 않았다.

오씨는 정신나간 사람처럼 새벽 2시에 계양산에 올라 통곡을 하고 고함을 지르기도 했다.

특히 해고통지를 받기 며칠전 10여년 동안 어렵게 저축한 돈으로 계양구에 32평 아파트를 장만했고 지금까지 살고있는 18평형 연립을 팔고 막 이사하려고 준비하던 때라 해고의 충격은 더욱 참담했다는 것이다.

큰 아파트로 이사할거라는 기대에 부풀어 좋아하던 아들 병식와 딸 다솜이, 아내의 허물어진 표정을 오씨는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오씨는 아직도 18평 연립에 살고 있지만 희망을 가졌기에 곧 새로운 집으로 이사를 계획하고 있다.

오씨는 해고통지를 받은 다음날부터 대우차 부평공장 일대에서 20여일간 해고자들의 농성에 참가했다.

공장을 점거한 해고자들은 공장 안에서 농성을 벌이고 오씨 처럼 미처 공장으로 들어가지 못한 해고자는 컨테이너로 가로막힌 정문 앞에서 항의 농성을 벌였다.

농성중 오씨는 아내가 핸드폰으로 당시 초등학교 6학년이던 큰아들 병식군이 중학교에 전교 2등으로 입학해 장학금을 받게 됐다는 소식을 받고 농성장을 빠져 나왔다.



중학생이 되는 병식이를 생각하니 순간적으로 정신이 번쩍 들었다. 아침이면 농성장으로 출근하던 오씨는 다음날 부터 일자리를 구하려고 수소문을 했다.

일자리를 찾으러 나가려는데 둘째인 딸 다솜이(당시 초등4학년)가 “아빠 힘내세요”라며 주머니에 넣어준 쪽지 편지도 큰 힘이 되었다고 한다.

해고된지 한달여 시간을 백방으로 뛴 끝에 남동공단의 산업기계를 생산하는 (주)DY라는 중소기업에 일급 2만6천원의 일용직 자리를 찾았다.

졸지에 대우자동차 해고자로 낙인 찍히고 쫓겨났기에 살기 위한 몸부림으로 일용직 사원으로 출발을 할 수밖에 없었다.

1년 9개월간 정식사원이 되기까지 그는 몸부림을 쳤다. 남들보다 1시간 먼저 출근하고 밤 10시가 되어 퇴근하는 고된 삶을 산 것이다.

산업기계를 생산하는 중소기업이어서 고된 일밖에 없었다. 마침내 (주)DY의 정식사원이 되고 대리, 과장으로 승진하며 인정을 받기까지 역경의 과정은 아직도 손가락 군데군데에 남은 굳은 살에 고스란히 남아 있다.

해고의 경험으로 오씨는 사고방식이나 생활인으로서 또한 가장으로서 성숙되어 갔다.

심리적인 안정을 찾아 가면서 예전처럼 교회도 나가게 되었다. 주말에는 교회에서 자원해 주차봉사 활동도 시작했다.

대우차에 다닐 때에는 구역예배를 마치고 돌아온 아내에게 소리를 지르고 성경책을 찢어버리기도 하고 술집에서 술값이 없다며 돈갖고 나오라고 아내에게 전화를 했던 과거와 비교하면 확 달라진 모습이다. “지금은 애 아빠가 주말이면 앞장서서 아이들과 함께 교회에 가요”라며 아내가 오씨를 추켜세웠다.

오씨는 요즘 대우차에서 해고된 이유가 어쩌면 자신에게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을 한다.

자신에게 문제를 찾으려는 여유가 생긴 것이다. 대우차에서 해고되던 해 초등 6학년이던 아들 병식이가 이제 고3 수험생이 되었다.

딸 다솜이는 여고 1학년. 두 아이가 모두 학교에서 내로라 할 정도로 우수한 성적표를 받는다.



“해고의 경험이 인생의 쓴약이 된 것 같다”는 오씨는 그간의 고난과 역경을 겪은 탓에 세상을 바라보는 시야가 훨씬 넓어졌다.

앞으로는 어떤 험난한 세파가 닥치더라도 헤쳐나갈 자신감도 생겼다.

“우선 회사가 있어야 직원이 있다”며 “과거 대우차 시절의 정서를 버리고 경쟁력이 있는 회사를 만드는 것이 구성원의 절대적 책임이다”라며 해고의 경험을 바탕으로 가치관도 갖게 되었다.

오씨는 요즈음 작은 괴목에 난을 붙이는 분재에 재미를 붙었다. 앞으로 40년의 세월을 준비하려는 게획도 세웠다. GM대우자동차에 미래의 희망을 걸었다.

“이젠 아무리 험남한 일이 닥쳐도 희망을 일구는 기쁜 마음으로 걸어 갈 것입니다” 김기성기자 audisung@i-today.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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