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예순셋 된 큰 애가 초등학교 4학년때 장사를 시작했으니까 몇 년이 된 거야? 여기서 늙었지 뭐.”




인천 동구 송현자유시장(중앙시장 옆)에서 한평생을 보낸 정옥련 할머니(80. 남구 주안동).

결혼하고 인천에 와 먹고 살 것이 없어 시장 한 귀퉁이에서 노점을 시작한 것이 평생의 업이 될 줄은 몰랐다. 당시 이 시장은 인천에서 군용품을 가장 많이 다양하게 갖다 파는 곳으로 유명해 할머니 역시 그런 물건을 떼어다 팔았다.

“한뼘 크기 노점이었는데 장사는 잘됐어. 그때 한창 미군들 입던 군복을 깁거나 꿰매서 많이들 입었어. 질기고 따뜻하다고 너도나도 미군 군복을 찾았거든.” 장사를 하는 틈틈이 할머니는 찢어진 군복이나 담요를 기워놓곤 했다. 하루가 어떻게 가는 지 몰랐지만 그렇게 모은 돈으로 두 아들 뒷바라지를 할 수 있었으니 피곤한 것은 뒷전이었다.

큰 장사가 아니니 큰 돈을 벌기도 어려운 형편. 먹을 것 안먹고 모은 돈으로 시장에 세평짜리 내 가게를 가졌다. 물건도 두 줄로 진열할 수 있고, 서울 동대문장에 가서 수시로 물건을 떼어오는 재미가 꽤 쏠쏠했다. 어머니의 부지런하고 검소한 삶으로 큰 아들은 고교교사, 둘째 아들은 개인사업가가 됐다.

그 빛바랜 과거를 간직한 채 2006년 2월을 보내고 있는 정 할머니.
큰 아들이 정년을 맞은 나이가 됐으니 이제 장사를 접을만도 하건만, 지금도 할머니는 매일 가게로 출퇴근을 한다. 남의 터를 포함해 6평 남짓한 가게에 걸려있는 군용점퍼와 담요, 바지, 니트…. 기다란 장대로 천장 높이에 무거운 옷들을 걸고, 가게 밖으로 옷들을 내다 쌓아야 하는 일이 힘에 겹지만 하루도 가게문을 닫은 적은 없다.



“몸이 힘든 것보다도 장사가 안되니까 아주 힘들어. 에프(IMF를 의미)라나 뭐 그런 게 온 다음부터는 손님이 더 없어. 하루종일 한 사람도 가게 앞으로 지나가지 않을 때도 많아. 하루에 얼만치가 아니라 한달에 윗도리 하나 팔면 그나마 다행이지. 그렇지만 이렇게 가게에 나와 있는 게 맘 편해. 움직이니까 몸도 덜 아프고.”

온기라곤 가게 한쪽 손바닥만한 구들장이 전부. 어두침침한 시장통을 휩쓸고 지나가는 매서울 겨울바람을 온전히 맞고 앉아 할머니는 차가운 도시락을 연다. 옆집도, 그 옆집도 문을 닫고 어디론가 가버린지 오래, 좁은 골목골목 빼곡이 들어선 점포 여기저기에는 시장에서 젊음을 보낸 노인들만이 무거운 몸을 누인채 졸음을 참고 있다.

점포수가 수백여곳인 이 시장은 재개발 얘기가 수없이 나돌았지만 아무 것도 구체화된 것은 없다. 담벽을 이리 깁고 저리 막아 겨우 골조를 지탱해가고 있는 상황이지만, 점포를 소유하고 있는 상인들 중심의 움직임이 선행돼야 해 동구도 진행상황을 지켜보고 있다.

인천의 오늘을 있게 한 숨은 공로자의 한 명이기도 한 정 할머니. 송현자유시장의 터줏대감 정 할머니 얼굴에 환한 빛이 다시 떠오르기를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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