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일~29일까지 인천 한중문화관 갤러리에서 16회 개인전

 

 

전미선 작가의 제16회 개인 미술전시회 'Qavah展'이 인천문화재단의 후원으로 열린다. 아래는 전 작가 측에서 보내온 전시 개요.

◇ 전미선 작가의 'Qavah展'

'Qavah'는 기다림이며, 'COVID-19 치유와 회복'의 소망과 기다림이다.  "앙망"이라고 번역된 이 히브리어 Qavah ( קָוָה ) 는 "기다리다/기대하다/보다"는 뜻으로 주로 번역 된다. 단순히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성경적 관점에서의 "소망(hope)"을 가리키는 단어라고 할 수 있다. 전미선 작가의 소망을 담은 'Qavah展'은 2021년 현재 세계인의 간절한 소망을 담은 공동메시지 이기도하다.

◇ 전시개요

'Qavah展'은 오는 23~29일(28일휴관) 인천시 중구 한중문화관 갤러리에서 열린다. 전미선 작가 개인 미술전시회로는 16번째가 된다. 그는 지난 2017년 동행의 '빈의자'에 이어, 2018년 남북화해시대 '은혜-평화 공존展'으로 많은 관심을 모은 바 있다.

2020년 들어 인간의 욕심은  'COVID-19' 바이러스라는 전대미문의 재앙을 가져 왔다. "그러나 세계인들은 반성과 성찰 속에 재앙을 극복해 내고, 끝내  '치유와 회복'을 이룩해 낼 것"이라고 전미선은 믿는다. 그는 이같은 고민과 의지를 담은 작품 50여점을 2020~2021년 기간 동안 준비해 인천문화재단과 함께 이번 전시회를 마련했다.

전시된 작품은 ▲COVID19-Light of life 1~4 30x30cm mixed media on panel 2021 ▲COVID19-Light of life 100x100cm mixed media on panel 2021▲COVID19-Unending love 50x50cm collage with resin on panel 2021▲COVID19-Unending love 50x50cm collage with resin on panel 2021▲COVID19-Unending love 80x80cm collage with resin on panel 2021▲COVID19-Hidden Power 1 70x40cm collage on panel 2021▲COVID19-Hidden Power 3 70x40cm collage on panel 2021▲COVID19-Flying 30x30cm collage with resin on panel 2021▲COVID19-Recovering 30x30cm collage with resin on panel 2021 등이다.

◇ 전미선의 작가노트

“예술은 세계로부터 이탈한 것이 아니라 세계의 일부이다.”

현대 사회의 물질문명의 이기는 사람의 욕망을 확대시키지만, 늘어난 욕망에 비례해 정신적 결핍도 증가한다.

나는 '보이는 세계' 만큼, '보이지 않는 세계'를 탐색하고 싶었다. 

'보이지 않는 세계' 속에서 감각은 확장된다. 나는 확대된 감각을 통해, 보이진 않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또 다른 작용의 세계'를 발견하고 놀라기도 한다. 

나는 '보이는 세계'와  '보이지 않는 세계'의 경계에서의 '두 세계의 공존' 에 매료되었다. 

이러한 '공존'은 상호작용된 '신과 인간'이라는 존재가 탄생시킨 결과물이라고 생각한다. 

'보이지 않는 세계'와 '보이는 세계'는 상호작용을 한다. 이로써 우주는 조화를 이루어 간다. 조화로운 우주의 에너지는 신의 영역에서 출발했을 것이다.

나는 지난 10여년간 '평화 공존'에 관심을 갖고 작업을 했었다. '공존'은 우주 조화의 한 부분이다. 이러한 조화를 이뤄낸 에너지는 신에서 출발했으나, '인간존재'가 주체적으로 이 문제를 해결해 온 것으로 생각된다.

2020년 무서운 COVID-19가 출현했다. 2년째 개인과 집단사회의 모든 시스템은 충격속에 흔들리고 있다. 판이 완전히 바뀌고 있다. 이러할수록 창조주에 대한 신뢰는 든든한 힘을 발해, 치유와 회복의 청신호를 보내 준다.

인간들은 타락한 실존으로 본분을 망각하고  죄와 욕심으로 인간의 영역을 벗어나 신의 영역까지도 침범하며 이치를 거슬러 결국 자연은 신음하고 탄식하다 결국 COVID-19를 출현시키고 말았다.

인간들은 공포와 두려움 속에서 절규하며 징조와 심판 ,재앙 ,마지막 때라고 말들하며 불안과 공포 속에 사로잡혀 있다. 그러나 이시대의 한복판에서 진리와 진실을 직시할 때 전능자의 선한능력은 끝이 없는 사랑으로 치유하며 회복시켜  지구를 재정립 하리라 굳게 믿는다.

나의 작업 과정은 그 동안 해왔던 쌓여진 노하우와 암묵지에 의해 창출된다.

화면을 어떻게 구축할 것인지에 관해 분명한 계획을 요하지만 그리는 과정에서 예외적 상황이 돌출 되어 각 변수에 조응하며 작업을 진행한다. 그래서 언제나 계획이상의 것들이 표현 되곤 한다.  작업을 하며 순간순간 결단을 내려야하는 작업 공정을 통해 완성한다.

자유로움과 우연적 질서의 하모니를 통해 보이지 않는 세계가 보이는 세계에 끼치는 영향력을 감각에 의해 표현하고 있다.

부재를 통해 존재를, 식물과 동물 등 자연의 패턴과 현대적 디자인 패턴을 조합하며 문명이 안겨주는 현대인의 고독한 면을 원시적 느낌과 조화 을 이루며 편안함을 주고 있다. 패턴에 관심을 갖고 있는 나는 붓으로 패턴을  그리며, 상품화된 잡지를 꼴라주 방식으로 숨겨진 힘에 의해 벌어지는 상황을 이야기 하고 있다.

팬데믹 이란  힘든 과정을 지내며 생명의 소중함과 인간과 자연의 공존과 상생에 관해 좀 더 깊은 의식을 갖게 된다.

그 속에서 '보이지 않는 힘'으로 인해 나는 평안을 잃지 않고 힘든 상황을 이겨내고 있다.  세계적인 이 상황이 치유되고 회복 되리라는 ‘믿음’으로 함께 기다리며, 우리 함께 이겨 나아가길 간절히 소망하며 오늘도 나는 붓을 힘차게 잡는다. Qavah(소망의 기다림)!

◇전미선의 구성적 감각 : 다다(dada)적 난파(難破)를 피하는 감각의 항해술 /심상용(미술사학 박사. 서울대학교 교수)

1. 특별할 것이라곤 없어 보이는 일상의 이미지, 세계의 분절된 파편들이 이 적절하게 장식적인 세계로 불쑥 난입한다. 하지만, 크게 도발적이지는 않은 방식이다. 드로잉의 분방한 촉수들이 화면의 곳곳에서 콜라주된 이미지들과 자리를 다툰다. 이미지들의 배치, 구성은 임의성의 미학을 따른다. 1956년 런던 화이트 채플에서의 리차드 해밀턴의 개인전과 1961년 모마에서 열렸던 《아쌍블라주의 예술. The Art of Assemblage》 전 이후, 그리고 입체파, 다다, 초현실, 같은 흐름들 거치면서 익숙해진 일종의 교환과 공존과 관련된 기법을 통해 표명된 바 있던 그 미학이다. 그 계보는 네오 다다(neo-dada)와 다다(dada)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후 문제적이었던 로버트 라운센버그의 회화가 적극적으로 시도했듯, 이를 통해 예술은 삶의 요소들, 세계를 구성하는 요인들과 함께 하고 싶어 했었다. 멋지게 표현하자면 “삶과 예술 사이”쯤을 구축하고 싶어했다고 말할 수 있는데, 이는 예술이 적어도 삶보다는 덜 부조리한 것에 대해 가졌던 이전의 믿음에 균열이 초래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분명 전미선의 어법도 이와 일맥상통하는 지점이 있다. 출처가 상이하고 성격적으로 이질적인 것들의 임의적 콜라주 방식을 보라. 저렴한 상업 잡지의 이미지를 콜라주하는 것은 네오 다다나 그 연장인 팝(Pop)의 전형적인 기법이다. 구성에 관여하는 각각의 것들은 탈맥락적이다. 다다(dada)적 구성을 앞세우는 임의성의 미학 위로 자유롭고 절제된 드로잉의 선들이 춤추듯 흐르고 흔적을 남기는 방식도 다르지 않다. 이러한 어법에서 계보학적 다다이즘을 추론해내는 데는 특별한 문해력조차 필요하지 않다. 그렇다면, 전미선의 세계도 다다와 네오 다다의 DNA, 꼴라주와 아쌍블라주의 미학 계보로 정리하는 것으로 충분해 보인다. 하지만, 이는  화면 전체에서 오는 분위기, 시각적으로 정연하고 감성적으로 따듯한 그것을 설명해내지 못한다. 전미선의 회화에서 톤은 안정적으로 조율되고 유지되고 있다. 과도하거나 파격적인 변주는 충분히 곰삭여져서 오히려 서정적으로 다가온다. 구성적 감각은 시각적 파격이나 채색의 과잉에 기대지 않는다. 그것 위를 감아도는 분위기는 한껏 긍정적이다. 다다나 네오 다다의 전복이나 해체 지향과는 거리가 멀다. 

회화적으로 구현된 이 세계는 그 내부의 모든 것들로 서로에 대해 특권적이지 않으며, 균형을 깨지 않는 관계성, 곧 은유적인 수평성을 성취하도록 이끈다. 구성의 각 시각적 단위들은 각각의 고유한 서사를 지니고 있지만, 어떤 서사도 서를 맞댄 채 이웃하는 다른 서사들에 대해 권력적으로 우위에 있거나 열등하지 않다. 이 수평성이 이 회화의 잘 통제되고 유지되는 수평적 긴장감의 요인이다. 전 화면을 아우르는 하나의 전체주의적 서사는 거부된다. 

2. 전미선의 회화는 현대적 삶을 지배하는 영혼의 결핍을 반어적으로 피력한다. 그의 구성은 단지 시지각적 변주의 일환으로 그치지 않는다. 작가의 구성적 감각은 회화의 구성적 요인들 간의 조화를 성취해내는 것을 넘어, 더 먼 곳에 관여한다. 명백하게 장소적인 개념은 아닌 ‘그곳’에 대해서는 그의 회화에 등장하는 비둘기, 하늘, 바다 같은 풍경적 요인들이 결정적인 단서가 된다. 비둘기는 평화나 ‘거룩한 영’ 곧 세속화되지 않은 구분된 영적 태도의 오래된 은유임이 분명하다. 그 의미의 단층들은 예컨대 하트(하트) 모양에 ‘Invite You’나 ‘사랑으로의 초대’와 같은 문장이 꼴라주된 것을 통해 유추가 가능하다. 그곳은 부조리한 이 세계 너머의 세계, 고통도 눈물도 없는 어떤 초월적인 차원으로, 그 자체가 사랑이며 그렇기에 만인을 향한 초대가 그 본연인 그런 곳이다!

전미선의 감각은 “보이지 않는 세계”에 대한 염원으로 이끌린다. 그가 자신의 ‘감각의 확장’을 말할 때, 그것은 “이 세상의 저편에서 작동하고, 이 세상에서 감지되는 것으로의 확장을 의미한다. 라우센버그의 아쌍블라주 회화가 예술을 삶의 어떤 중간 지점에 위치시키고 싶었다면, 전미선은 예술을 삶의 부조리를 초극하는, 생명의 빛으로 나아가는 관문으로 재구축하고자 한다. 그 관문을 통과해 그 지향점을 무한히 연장한다면, 어떤 궁극의 세계에 가 닿는가? 실존에 지친 영혼은 답을 재촉한다. 더는 견디기 어려운 격한 갈증이 상상적 추론을 독려한다. 전미선이 부단히 이끌리는, 초대가 본연인 그곳으로 따라나서면, 우리는 전녕 인도되는가? 그렇다면 어디로 인도되는가? 여기서는 마치 퍼즐 풀 듯 문제를 대하는 무모함 대신, 가능한 두 가지 사실을 확인하는 것을 통해 이 질문을 보다 유효한 것으로 만드는 것이 좋겠다.

그 첫째는 전미선의 탈맥락적 구성의 감각이 (다다나 네오 다다의 그것과는 정반대로) 이 고조된 혐오의 시대, 문명과 자연의 파국적인 불협화음, 이분법과 적대주의로 온갖 재앙에 직면한 시대의 절실한 문제의식에 직결되어 있다는 것이고, 둘째는 바로 그 증오와 적대의 세계 한가운데서 미지의 소망의 바다로 나아가는데 요구되는 미적 항해의 한 감각적 측면에 전미선의 회화가 부단히 다가서고 있다는 사실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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