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03년 ‘사랑합니다’로 데뷔해 감미로운 목소리에 훈남 외모로 많은 여성 팬들을 거느렸던 팀은 1980~1990년대생 여심을 흔들었던 대표적인 가수다.

이런 팀의 어머니, 이은성 목사가 시인·작가·강사로 활동하며 어려운 이웃들을 위한 선교‧전도활동을 하고 있어 그 명성이 자자하다.

팀의 아버지, 황준석 목사는 미남침례회한인총회 증경총회장·북미주친선협회 회장·이승만건국대통령기념사업회 필라델피아 지회장·필라델피아 큰믿음제일침례교회 담임목사를 맡고 있으며, 묵묵히 가족이라는 울타리를 든든하게 치고 있다.

'여섯 남자와 산 이야기, 하나님이 키우셨어요'의 저자 이은성 목사를 만나 그녀의 가족과 일상에 대한 얘기를 나눠봤다.

Q. 이모를 통해 예수를 영접했고, 처음에는 ‘여호와의 증인’이었다고?

A. 하나님을 믿기 전 고모 때문에 ‘여호와의 증인’에 대해 알게 됐어요. “하나님 안 믿으면 멸망 받는다”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사시던 고모였기에 전 솔직히 고모가 제정신으로 보이지 않았죠. 그러다가 중학교 친구 한 명이 함께 공부하자며 저를 집에 초대했어요. 친구 집에 갔더니 사람들이 많았고 학교 공부를 위해 모인 줄 알았는데, ‘여호와의 증인 교리 공부 모임’이었던 거예요.

그 모임에서 교리공부를 인도하는 사람이 인천에서 유명한 고등학교 남자 선생님이었는데요.

고등학교 선생님이 교리를 가르치고 계시고, 저를 집에 초대했던 친구가 반듯한 친구였기에 ‘여호와의 증인’에 호기심이 생기기 시작했죠.

그렇게 고등학교 2학년이 될 때까지 5년 정도 쉬지 않고 교리공부를 체계적으로 했고, 기독교는 ‘마귀의 종교’라는, 기독교에 대한 부정적인 교육을 받아 왔지요.

그러던 중 아버지가 하시던 사업이 완전히 망해서 형편이 어려워져 학생 과외 아르바이트를 하며 생활을 할 때, 이모가 제게 남만 가르치지 말고 네 동생도 좀 가르쳤으면 좋겠다고 말씀을 하셨던 적이 있어요.

이모댁에 들어가 살면서 이모의 외동딸을 가르치게 됐는데 독실한 기독교 가정이었던 이모가 함께 가정예배를 보자고 말씀을 하셨어요. 간곡하게 말씀을 하셔서 기독교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이 가득했음에도 불구하고 부흥회에 참석하게 됐죠.

그렇게 나가다 보니 새벽예배까지 드리게 됐고, 새벽 기도회 때 위아래로 하얀 모시옷을 입은 강사 목사님이 정결하고 멋져 보여 친근감이 가서인지, 설교내용들이 가슴으로 와닿으면서 감동으로 다가왔어요.

그렇게 성경공부를 시작하게 됐고, 성경의 깊은 중심 진리를 깨닫고 이해할 수 있는 큰 은혜를 하나님께 받게 됐습니다. 올바른 믿음의 시작이었죠.

기독교를 믿으면서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궁금증이 생기고 사람들과 대화가 되니 소통이 되더군요. 제가 말씀드릴 수 있는 건 ‘여호와의 증인’의 예수는 인간일 뿐이고, 기독교의 예수는 하나님이 인간으로 온 것입니다. 전 ‘여호와의 증인’도 믿었었기에 성경을 한쪽만 본 게 아니고 비교를 하면서 얻은 믿음이라, 제 믿음이 올바르다고 생각해요.

Q. 결혼 전 황준석 목사를 보며 “이 남자다” 싶던 때는?

A. 사실은 황 목사님 말고 결혼을 약속한 사람이 있었는데 목회자의 자녀였지만 사람에게 깊은 상처를 받은 뒤로 기독교를 반대했었어요. 믿음과 생각이 다르니 저희 둘은 점점 어긋났고 자연스레 멀어지게 됐습니다.

처음 교회를 다닐 땐 교회 안에서는 연애나 서로 좋아하는 것은 없는 줄 알았어요. 그런데 아니더군요(웃음).

한번은 신림동의 한 개척교회에서 지역 배구대회가 있었는데, 직장생활을 하던 당시 대회 응원을 오라고 해서 갔던 적이 있어요. 황 목사님은 깡마르고 ‘안생기신’ 분인데 그 배구대회에서 황 목사님 때문에 승리를 하는 것을 보고 속으로 ‘저 분도 남자구나’하고 살짝(?) 남자로 보였죠.

또 크리스마스 때는 오페레타로 황 목사님이 천사 가브리엘 역을 맡았었는데, 정말 멋있어서 “이 사람 남자구나”라고 제대로 느꼈습니다.

프로포즈는 눈 오는 날 저를 집에 데려다 주면서 했는데 아직 결혼에 대한 생각이 없었기에 알아듣지 못한 채 그렇게 허무하게 프로포즈는 지나갔답니다.

프로포즈 내용은 자세히 기억은 안나지만 “이 선생님 같은 분이 옆에 있으면 목회생활을 할 때 도움이 될 것 같아요” 이런 내용이었던 것 같아요. 그러니 못 알아 들을 수 밖에요.

저희 아버지께서 황 목사님과의 결혼에 “후회없겠냐”고 한마디 물어보셨는데요. 전 황 목사님을 이성이라는 생각보다는 존경하는 사람이었기에 결혼을 선택했습니다.

Q. 남편 황준석 목사에 대해?

A. 남편을 점수로 매긴다면 20점이요? 다른 사람들에게는 99.9점짜리 사람일 수도 있지만 항상 남을 먼저 생각하는 남편은 제겐 20점이라는 점수도 후한 점수 같아요(웃음).

황 목사님은 그동안 가정적이지 않았고 집안일도 잘 도와주지 않았어요. 단, 저를 최고로 알고 저한테 가정의 모든 것을 위임했죠. 그러나 오히려 이것이 저를 더 힘들게 만들었는지도 모르겠어요.

황 목사님은 미국에서 지낼 때 동양인 말고도 흑인들을 위해서 항상 힘써왔는데, 한국에서도 흑인들을 초청해 한국의 역사를 가르치고 한국의 곳곳을 소개해 그 분들에게 또 한 번 한국을 알리는 계기가 됐답니다.

Q. 목사로 생활(전도)하면서 제일 기억에 남는 성도가 있다면?

A. 미국 필라델피아에 우리나라 부산 무역선박들이 많이 들어오는데, 국제무역선에서 일을 하던 한국 사람(故 황봉현 씨)이 배 위에 흐른 기름에 미끄러져 배 밑으로 추락해 하반신불구가 된 사건이 있었어요.

그 분은 척추를 다치는 바람에 하반신불구가 됐는데, 그를 돕는 모금을 하면서 황 씨가 다니던 회사를 상대로 소송을 해 승소를 했고, 황 씨 아이들의 학비와 평생의 생활비를 보장받을 수 있었습니다. 지금은 돌아가셨지만 아직도 그 때의 기억은 생생해요.

또 어떤 여자 분이 떠오르는데요. 그 분은 남편이 바람을 펴서 남편에 대한 원망과 분노로 정신병을 얻었고, "피를 봐야 자신이 산다"는 환청이 들려 부엌칼로 아이들을 찌르려던 찰나, 극적으로 저희 부부에게 발견이 돼서 집에 데려와 돌봐준 적이 있어요.

이렇게 항상 희망을 포기하지 않고, 어렵고 힘든 사람을 도우며 생활하다 보니 경제적인 책임에 너무 힘들었습니다. 하지만 저희 부부는 항상 하나님의 종이라 생각하고 열심히 살아가고 있어요.

Q. 아이를 다섯이나 낳는 것은 쉽지 않아 보인다. 아이욕심이 있어 다섯 명이나 낳게 된 건지, 키우면서 힘들거나 어려운 점이 많았을텐데?

A. 결혼 전에는 아이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어요. 아들 둘을 낳았을 때도 친정 어머니가 “딸이 좋은데 딸 하나를 더 낳아라” 하시는 통에 셋째까지 임신했지만 아들이었지요.

황준석 목사님은 자격지심·상처가 많은 사람 등 어려운 사람들을 돕는 목회를 하기 때문에 항상 저희 목회는 어려웠는데요. 게다가 아이들도 많다 보니 힘든 나날의 연속이었지요. 희생과 헌신의 삶을 길로 알고 살아왔어요.

그러던 중 둘째 폴이 아파트 밖에서 놀다가 넘어져서 잇몸을 많이 다친 적이 있어요. 당시 저는 세탁소에서 일하고 있었는데 황 목사님은 상처가 심한 아이를 병원 응급실이 아닌 제게 데려온다고 전화가 왔죠. 이유인즉슨 응급실에 가면 기다리는 시간 때문에 성도에게 이사예배를 드리러 가기로 했는데 시간이 맞지 않다는 것이었어요.

아파트에서 병원과의 거리는 불과 2분이었고, 제가 일하는 가게까지는 자동차로 30분 거리였는데도 말이죠.

그때 당시 폴은 잇몸이 심하게 파여서 신경까지 튀어나와 있는 상태여서 매우 심각했어요. 정말 하늘이 노래지고, 이해가 되지 않았죠.

뭐 이런 사람이 다 있는지 그동안 남편에게 들었던 원망들이 한꺼번에 솟구쳐 올라왔어요. 남편을 더이상 보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굴뚝같던 순간이었습니다.

남편에 대한 원망이 계속 쌓여갈 때쯤 하나님이 제게 답을 주셨어요. “사랑하는 딸아 내 종의 아내로 너를 지명했거늘, 돕는 배필이 되라고 돕는 능력을 너에게 줬다. 무지개도 빨강, 주황, 노랑 등 서로 자기만의 색깔들이 공존할 때 사람들에게 행복을 주지 않더냐. 다름 그대로를 인정하는 삶이 무지개처럼 하모니가 되는 삶이다” 남편과 못 살겠다 했던 설움이 제 자신을 죽이고 있을 때였는데, 그제서야 마음의 찬양이 오면서 시원해짐과 동시에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바뀐 상황은 없지만 울면서 했던 마음의 대화 끝에 깨달음을 얻은 것이지요.

Q. 넷째 아들, 가수 팀에 대해?

A. 팀은 12월 23일 성탄절의 축제 분위기가 한창 피어오를 무렵, 제게 정말 크리스마스 선물처럼 온 아들이에요.

팀은 실제로 내성적이나 밖으로는 밝고 명랑하게 보이는 타입인데요. 어릴 때 할머니랑 많은 시간을 보내서 그런지 대범한 성격은 아니에요. 또 자상하면서도 새침한 면도 있는 것 같아요.

팀은 2006년 목상태가 좋지 않아 음악 활동을 쉬었고, 2012년 연초에 발매한 ‘사랑 참 나쁘다’를 발매하고, 인도네시아에서 가수와 배우로 활동했었어요. 이후 오랜 공백기를 가졌다가 2016년 MBC 예능프로그램 ‘복면가왕’, 2018년 JTBC ‘슈가맨2’에 출연해 화제를 모았던 적이 있었죠.

팀의 앨범 중 첫 번째 앨범에 ‘Always’‧‘Hey Girl’, 두 번째 앨범 ‘난 어떻게’‧‘우정’, 세 번째 앨범 ‘조심하세요’‧‘내게 와줘요’, 다섯 번째 앨범 ‘닭살커플’은 셋째 대니가 직접 작사‧작곡을 해준 노래들인데요. 네 번째 앨범에 ‘후회하지 않아요’는 작사를 직접 해줬었고요.

이렇게 데면데면하면서도 서로 챙기는 형제들을 보고 있노라면 절로 미소가 지어집니다.

넷째 팀은 현재 교제 중인 여자 친구와 올해 말 결혼식을 올릴 예정인데요. 올 초 결혼 예정이었으나 코로나19 때문에 일정이 연기됐어요. 더욱 자세한 건 아들에게 직접 맡기겠습니다(웃음).

Q. 넷째 가수 팀의 노래 중 가장 좋아하는 노래는?

A. 팀의 노래는 다 좋아하는 편이지만 그중에서도 ‘Walk On Water’와 ‘Morning Star’를 좋아해요.

특히 ‘Morning Star’ 가사를 보면 “새벽별 가장 빛나는 것은 제가 아닌 당신이오, 제 삶을 통해 당신의 자비가 제 안에 흘러넘치고 있다는 것을 보게 하옵소서”라는 내용이 담겨 있는데 가슴에 와닿는 가사입니다.

Q. 5명의 아들 각자의 가장 특출난 자랑을 한다면?

A. 첫째 데이빗과 둘째 폴은 2살 터울, 폴과 셋째 대니는 4살 터울, 대니와 넷째 팀은 2살 터울, 팀과 막내 져슈아는 7살 터울인데요.

사실은 넷째 팀을 낳고 폐경이 왔는데 막내가 들어섰답니다. 사실 넷째가 들어섰을 때 너무 싫었었어요. 어려운 가정 살림에 원치 않는 아이였죠.

하지만 이내 생각을 바꿨어요. 하나님의 은혜로 태어난 아이인데 얼마나 소중한 생명인가요! DNA, 지문 하나하나 다르다는 것은 얼마나 경이로운 일인지요.

아이들 이름은 제가 직접 지었어요. 첫째 데이빗‧성민은 거룩한 백성이라는 뜻이고, 둘째 폴‧지민은 지혜로운 백성, 셋째 대니‧유민은 온유한 백성, 넷째 팀‧영민은 영화로운 백성, 막내 져슈아‧찬민은 찬양하는 백성이라는 뜻이랍니다.

큰 아들은 결혼을 해서 딸만 둘에 목회자이며, 기타를 프로처럼 잘 치는데요.

둘째 아들도 결혼을 했고, 첫째와 마찬가지로 딸 둘에 사업가이자 예배찬양 인도자로 미국에서 지내고 있답니다.

셋째 아들은 딸 하나, 아들 하나, 뱃속에 셋째 딸이 내달 출산 예정으로 뮤지컬 감독과 작사·작곡가이자 교육자입니다. 국제학교 교목(학교 목사)으로, 엔터테인먼트 회사도 운영하고 있어요.

넷째 팀은 모두 잘 아시다시피 가수로 활동을 하고 있고요.

막내는 결혼은 했지만 아직 아이가 없고, 교회에서 청소년 찬양인도를 담당하고 있습니다. 막내도 넷째와 비슷하게 노래와 춤으로 그 재능을 인정받았었는데요. 고등학교 졸업 후 대학을 진학하기 전 미국 모델 콘테스트 상을 받기도 했어요.

Q. 시 쓰기를 좋아한다고 들었다. 시를 쓰실 때 구상의 소재는 어디에서 찾는지?

A. 저는 시를 “시를 써야지” 하고 쓰는 것이 아닌, 길을 가다가 작은 들꽃이 보이면 들꽃에게 말을 걸어 거기서 느끼는 감정과 생각을 글로 옮겨 적는 식으로 일상에서 문득 드는 생각을 글로 적듯이 시를 써요.

차를 타고 가는데 뜨거운 햇빛이 창문으로 들어오면 그 햇빛에 말을 걸면서 독백을 하는 거죠. 그렇게 자연스럽게 일상 속에서 시를 쓰고 있습니다. 지나치는 순간순간들을 글로 다루는 것이지요. 여태껏 써놓은 시가 많은데 그걸 한데 묶어 시집을 출간하려 계획하고 있습니다.

저는 대한시문화협회 동부지회장을 맡고 있기도 한데, 미국시인협회와 한국시인협회 서로의 연결고리가 저라고나 할까요.

Q. 강사로도 활동 하고 있다고 했는데 주로 어떤 강의를, 어디로 나가는지?

A. 교회‧개별 단체‧목회자‧대학생‧학부모 모임, CTS‧CBS 방송, 특별 세미나, 집회 등 많은 모임‧강의 활동을 하고 있는데 강의를 할 때마다 목회자들과 그의 가족들이 새로운 용기를 얻는 것에 보람을 느껴요.

Q. 이은성 목사, 자신의 삶을 돌아본다면?

A. 저는 미국 교회에서 지난해 3월 17일, 70살이 넘은 나이에 목사안수를 받았는데요. 목사안수는 늦게 받았지만 그동안 교회를 다니며 또 목회자의 아내로 살아오면서 가치관·결혼관·삶의 목적 등 세상을 보는 눈이 바뀌었습니다. 세상에 존재하는 많은 지식인들이 저를 통해 예수를 알고 예수에 대한 공부를 하는 것을 보면서 뿌듯하고 감격스러운 적도 많았고요.

모든 만물은 하나님의 작품이라고 생각하는데요. 저 또한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하나님의 작품이니 “나는 걸작이다” 이 생각을 항상 마음에 품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자기연민에 빠지고, 자기중심적인 종교생활은 진정한 종교생활이 아니라고 여기며, 바른 신앙이란 도리어 “지성이면 감천”이 아니라고 말씀드리고 싶은데요. 꼭 교회에 헌금을 하고 백일기도 등을 해야만 축복받는 것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Q.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이 있다면?

A. 이 세상의 모든 가족들에게 전하고 싶은 말이 있는데요. 그건 바로 부모‧자녀들이 하나님을 중심으로 살았으면 한다는 거예요. 하나님은 우리를 사람으로 이 땅에 내보내신 분이니까요.

하나님은 보이지는 않지만 만물 속의 영장이며, 부모가 자식을 평생 지킬 수 없으니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더욱 중요한 것 같아요. 자기중심적인 삶이 아닌 이웃을 사랑하며, 사회에 유익한 사람들이 됐으면 합니다.

 

다음은 이은성 목사가 직접 쓴 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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