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최초의 판유리 공장은 인천에 설립됐다. 6·25 전쟁으로 대부분의 기간산업 시설이 파괴되고, 우리나라는 유리 한 장도 만들 수 없는 어려운 처지가 됐다.

운크라(UNKRA: 유엔한국재건기구)의 도움으로 1956년 동구 만석동 석탄공사 저탄장 자리에 인천판유리공장 건설을 시작했다.

2월 14일 오후 2시에 열린 기공식에는 이승만 대통령이 장관들을 대동하고 ‘대통령전용열차’를 타고 참석했다. 이 공장은 당시 충주비료 공장, 문경시멘트 공장과 함께 3대 기간산업의 중요한 공장이었다.

운크라에서 214만 달러, 우리 돈으로 6억환을 지원받은 이 공장은 1957년 9월 30일에 준공돼 국내 최초로 한국 원료와 기술로 만든 판유리를 생산했다.

판유리공장의 급수탑은 이 일대에서는 어디서나 볼 수 있는 긴다리를 가진 높은 구조물이라 만석동 공장 지대의 상징물이었다. 한국유리공업으로 출발한 이 공장은 지금은 군산으로 이전했고 이름도 한국유리(한글라스)라고 고쳤다.

우리나라에서 발견된 유리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은 낙랑시대의 유적에서 발굴된 것이며, 처음으로 유리가 제작된 것은 삼국시대로 알려져 있다.

일찍부터 유리가 있었지만, 당시에는 보석과 비슷하게 취급될 정도로 귀중한 물건이었으며, 이는 유럽에서도 비슷했다. 이후 유럽에서는 산업혁명을 거치면서 유리의 생산이 가능해졌고, 이에 따라 건축물에 유리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개항과 더불어 우리나라에 세워진 서양식 건물에는 당시 인천에 진출해 있던 세창양행, 홈링거양행, 타운센드양행 인천지점 등에서 수입한 유리가 창문용으로 사용됐다.

인천에서의 유리 제조는 1905년 이후의 일이다. 1905년 3월 송월동에 설치된 구야(久野)유리제조소가 인천 최초의 유리제조소이다.

이후 1928년 4월 만석동에 인천유리제조소가 개업해 약병·과자병·어항 등의 각종 소규모의 유리 제품을 제작해 시내는 물론 충청도로 판매하고 중국으로 수출까지 했다.

이처럼 유리의 대량생산이 가능해짐에 따라 건물에 유리를 사용하는 경향이 증가하기 시작했으며, 1930년대에 등장한 도시형 한옥의 대청마루에 유리문이 설치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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