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익경제연구소장 하석용

어떤 시인은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하지 말라고 했다. 그리고 우리가 그래야 하는 이유로 힘든 날들을 참고 견디면 기쁨의 날이 올 것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참 간단하고 명료한 설득이고 다독임이다.

그렇다. 우리는 늘 이렇게 소위 희망이라는 것에 의탁해서 고단한 오늘을 견딘다. 오늘보다 나은 내일, 현실의 아픔을 보상하는 미래, 그런 믿음에 기대어 이 고해의 땅에서 하루하루를 살고 후손을 낳고 키운다.

그러나 인간의 희망이라는 것 또한 모든 다른 삶의 수단들처럼 필요하다고 그냥 쉽게 얻어지는 것은 아니다. 절망 이외의 것을 상상하기 힘든 때에 그 속에서 희망을 골라내고 그것을 의지할만한 기둥으로 일으켜 세우기 위해서는 남다른 식견과 지혜, 용기와 절제된 인격, 불요불굴의 좀 더 나은 미래에 대한 신념 같은 비상한 덕성들이 두루 갖추어지지 않으면 안 된다. 무릇 얻기 쉽고 흔한 것은 귀하지 않은 법이다.

그래서 인간은, 개인이건 집단이건 역사적으로, 설익은 희망으로부터 수없이 버림받고 그런 배반에 신음해 왔다. 또한 그것은 대개 평범한 인간들로서 감당하기 힘든 것이어서 F. 베이컨 같은 이는 “희망은 멋진 아침 식사이지만 동시에 형편없는 저녁식사이기도 하다”라고 그 배신의 역설에 침을 뱉기도 하고, 고대 로마의 철학자 세네카는 “희망이 없어지면 절망할 필요도 없다”라고 하여 희망의 상실을 몸부림치듯 반어적으로 방어하기도 한다.

바로 오늘, 나는 이 나라와 이 도시를 살아가며 또 다시 그 쓰라린 인간들의 “희망”의 역사를 반추한다. 정말 참고 견디면 희망의 날은 오는 것인지, 끝내 처절한 배반을 감내해야 하는 것인지, 아니…, 나와 이 사회에, 희망을 찾아낼, 아니… 만들어낼, 그야말로 희망은 남아 있는 것인지…. 그리고 그 허허로움의 끝에서 지팡이 하나를 더듬어 찾는다. 기대어 몸과 마음을 추스를 기둥 하나를 소망한다.

원래 인간의 살아가는 모습이 말 많게 마련이고 심지어 아수라라 할지라도, 어느 세상을 이 나라, 이 도시, 이 땅의 오늘에 비교할 것인가. 인간들 사이에서 돈과 권력 이외에는 할 이야기가 없고, 언필칭 “우리”를 외치지만 오직 “나”와 “내 입맛”에 부화뇌동하는 패거리를 부르는 야수들의 울음일 뿐이다. 책임을 버린 권한과 상식을 떠난 궤변, 염치를 잊은 허세, 절제를 모르는 만용, 방향을 생각조차 않는 폭주와 사색을 거부하는 소신, 공익으로 위장한 탐욕들이 오직 이기(利己)의 망나니 춤을 춘다. 제 입맛대로 실재(實在)를 가공하는 무책임은 소신과 다양한 시각이라는 언어로 분식되고, 무지는 참신함, 심지어 창조성으로 탈을 바꾸어 쓴다. 부끄러움과 겸손함은 오직 승패로 갈리는 이 전쟁터에서 마땅히 타기되어야 하는 구시대의 유습일 뿐이다. 세상은 음모와 불신으로 가득차고 이제 우리 사회는 더 이상 “진·선·미”를 추구하지 않는다.

이 사회의 눈과 귀, 입이 되어주고 마지막까지 시퍼렇게 살아남아 허덕이는 육신을 구제할 머리가 되어주어야 할 언론은 루머와 선동, 환락의 장사치로 전락한 지가 오래 되었고, 이제는 오히려 이 사회의 모든 부조리를 확대 재생산하는 시건방지고 타락한 권력으로 주저앉는다. 사회에 대해 아무 책임도지지 않는 언론, 그래서 그것은 또 하나 돈과 권력의 주체가 되어 간다.

이 때 비록 작지만 하나의 맑은 샘이 솟아나는 것을 어찌 반기지 않겠는가. 이 가물고 황량한 땅에 말라붙어 사라진 줄 알았던 이 끈질긴 수맥의 부활을 어찌 기뻐하지 않을 것인가.

인천신문, 나는 그대의 고난과 인고의 세월을 안다. 그래, 이제 일어서라. 그리고 오늘 이 세상이 그토록 갈구하는 하나 청량한 샘이 되고 우리가 고된 넋을 기댈 하나 기둥이 되어라.

/홍익경제연구소장 하석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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