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가 바뀌는 이때쯤 달력의 마지막 장을 접으며 습관처럼, 때로는 무슨 의무인 것처럼 뒤를 돌아본다. 그리고 언제나 거의 예외 없이 떠올리는 첫 언어가 ‘다사다난했던 한 해’라는 것이다. 연말에 이르고 보면, 어떤 보도 매체들도, 어떤 연말을 장식하는 무대 위의 인사(人士)들도, 이 말을 잊는 경우가 없다.

그렇다. 그렇게 인간 세상은 언제나 다사다난하다. 본래 없던 일을 만들고 다시 그 일들을 풀어가는 것을 ‘일삼아’ 살아가는 것이 삶이라는 생각에 이르고 보면, 인간들의 삶은 본디 다사다난하기 마련이다. 공자와 석가모니가 다녀가고 하나님의 아드님이 다녀갔다고 해도, 심지어 상제(上帝) 스스로가 직접 다녀가셨다고 해도 인간의 역사가 계속되는 한 그 본질이 달라지지는 않는다.

그렇기는 하되, 세상을 조금쯤 알게 되었다고 스스로 생각하게 되었을 그 언제쯤인가부터 줄곧, 이 계절의 허허로움이 유별하다.

그냥 “그렇게 다사다난한 것이 인생이야” 라는 말만으로는 위로되지 않는, 허물이 벗겨진 채 아물지 않는 표피의 지독한 쓰라림과, 무엇보다도 영영 채워지지 않을 것 같은 막막한 공허를 감당하기가 쉽지 않다. 무엇인가 그냥 이렇게 넘기고 지속해서만은 안 될 것 같은 강박에 쫓긴다.

조심스런 이야기이거니와, 인생을 발가벗기고 냉혹하게 객관적으로 드러내어 ‘별 것도 아닌 것’이거나 ‘아무 것도 아닌 것’이라한들 달리 똑 부러지게 반박하지도 못하는 것이 인류의 삶에 대한 철학의 역사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체념조차 하지 못하고 이렇게 때마다 허증(虛症)에 시달리는 것은, 아마도…, 내 삶이 객관적일 수만은 없고 그로 비롯하여 남들의 삶 또한 정나미 없는 객관적 어휘만으로 치부할 수 없는 탓일 것이다.

비록 제로 섬(zero sum) 게임이라 한들 그것은 삶이 멈추고 난 뒤의 ‘내게 속하지 않는 시간’에서의 문제일 뿐, 어찌 내가 살고 있는 오늘을 무의미하다 할 것인가. 어찌, 인격적인 삶에 대한 욕망을, 아직 숨 쉬고 있는 자로서 멈출 수 있을 것인가.

결국 이 허증은…, 아마도, 인격적인 가치의 손상과 희망의 모호함에서 비롯하는 것일 것이다. 아마도 그것들을 스스로 치유하지 못하는 무기력함에서 비롯하는 것일 것이다.

연말에 ‘일삼아’ 지난 한 해를 정산하는 보도 매체들의 ‘10대 뉴스’ 따위가 아무리 우울하고 아픈 일들로만 가득하다고 해도 이 사회로부터 아름답고 즐거운 일들이 모두 사라져 없어졌을 것은 아니다. 그러나 2014년은 그런 위로를 찾기에 힘이 겨울만큼 잔인했다.
 
누가 누구에게 라고 할 것도 없이 우리는 서로에게 무자비하고 비인간적이었다. 대선 불복, 종북 논쟁, 세월호 사건, 병영의 탈선, 연금 논쟁, 비선 논쟁, 심지어 땅콩 사건으로 이 사회는 끝도 없이 서로 물고 뜯었고 서로 울리고 울었다.

이제 갈라서기로 일을 삼는 이 사회의 동력은 골병이 깊어 시들어간다. 정부와 기업 가계 할 것 없이 경제에 대한 위기의식은 바야흐로 상존(常存)의 상태로 접어들고 있다. 이런 속에서 어느 틈새에 끼일만한 힘이나 영악스러움조차 갖추지 못한 그저 소박할 뿐인 영혼들은 몸 붙일 곳과 갈 길을 잃는다.

무릇 쇠퇴하는 사회가 가장 먼저 잃어버리는 것은 돈도 국경도 아니다. 한 사회가 무너질 때에 가장 먼저 파괴되는 것이 사회를 지도하는 인간적인 상식과 순리이고, 구성원들이 스스로 합의한 인격적인 품위를 잃어버릴 때에 그 사회는 정체하고 위기가 심화한다는 사실보다 명백한 문화인류사적인 지식은 없다. 우리의 역사 속에서 고구려도 백제도 신라도 고려도 조선도 모두 그렇게 무너졌던 것이 아닌가.

이제 이 사회에는 인격적인 모습이 얼마나 남아있는 것일까. 한 조각의 고깃덩이를 둘러싸고 으르렁대는 야수의 사회는 그러한 먹이를 어떻게 ‘함께’ 나누어야 모두 ‘함께’ 행복할 것인가를 고민하는 인격적인 사회와 명백하게 구별된다.

지금 우리사회는 돈과 권력, 그를 만들어 내는 표(票)라는 고깃덩어리를 사이에 두고 야수와 인간 어느 지점쯤에 서있는 것일까.

야수적이라는 자조(自嘲)를 피하기 위하여 민주, 이념, 정의, 인권, 선진, 현대, 언론, 자유, 정치, 심지어 민족과 통일, 국민이나 신념이라는 수사(修辭)들을 동원한다면 야수의 이빨과 발톱은 감추어질 것인가. 오히려 그러한 야비하고 부정직한 수식의 재주로 인해 이 사회의 인격적인 품위는 더욱 파괴되는 것이 아닐까.

오로지 최소한으로나마 인격이 보장되는 사회에 살기를 희망하며 그의 손상으로 인해 아파하는 무기력한 영혼들은 죄가 없다. 그들의 아픔을 구제하여야 나라가 산다는 것은 인류사적인 상식이다. 야수적인 본능을 다스리는 인격만이 오로지 다른 생명들과 구별되는 인간 창의의 영역이며 삶의 길이 아닐 것인가.

인격의 시대를 열지 못한 채 행복한 새날을 꿈꾸고 번영의 시대를 기원할 수는 없는 일이 아닌가.  /하석용 공존회의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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